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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창익 강사, 백낙준 박사 막내아들
모닝뉴스워싱턴

[포토맥 포럼] ‘홍익인간’정신을 교육이념으로 만든 백낙준 박사… 6월 강연회


포토맥포럼 6월정기강연회가 애난데일 소재 설악가든 식당에서 8일 오전 열렸다.

이날 강연 주제는 내가만나잊지 못할사람 시리즈로 ‘백낙준 박사’에 대해 강연을 백박사의 막내아들 백창익씨가 했다.

백창익씨는 1962년 도미, 미주리주에있는 타키오칼리지에서 경영학 전공, 중고컴퓨터사업을 시작 Auctor IT 회사의 창립 파트너로 활약40년간 인디아나 주에 살면서 한국과 미국의 상무성 사무실 서울에 개설 최고 명예상인 ‘Sagamore of the Wabash Award’상을 받았다.

백창익 강사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하려니 쑥스럽다며 아들이 아버지에 대해 말을 하는 것에 대해 조심 스럽지만 해보겠다고 서두를 꺼낸 후 강연을 시작했다.

좌측 사회 이은애, 우측 권세중 총영사

백박사는 할아버지(백영순씨)의 교육 열로 인해 서당을 수학 후 신식 교육을 받았다. 평북 신천의 선교사 학교(조지 미켈로니 교장)를 스스로 방문하여 돈이없고 숙식할데도 없는데 공부시켜 달라고 하여 선교사가 기특하게 여겨 선교사 집에서 집안일을 도우면서 공부하다 105인 사건(일본총독 테라우치 살해계획)으로 피해있으라는 권유로 중국 천진으로 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공부하다 앵글로 차이니스 컬리지에서 중국어를 배운 후 미국 샌프란 시스코로 도미할 때 일본에 정박 하여 검사를 하는데 일본 순사가 조선인을 끌어 내려 징병 하려는 목적으로 배에타서 백 박사의 배를 갑자기 치며 일본말로 말할때 백박사가 중국말로 일본말을 모른다고 하니 중국인이라고 보내줬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고 했다.

미국 파크대학교에 입학했다가 언어와 학업이 어려워 그만두고 다시 고등학교에 들어가 졸업후 복학했다. 졸업 후 프린스턴 대학교에 입학 학위를 받고 예일 대학교에 진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두번째줄 좌에서 두번재 백낙준 박사

한국을 떠난지 15년 만에 돌아온 백박사는 교원으로 일하려고 했더니 105인 사건으로 호적을 없애서 다시 호적을 만들어 백박사 자신이 호주가 되어 백내진에서 백낙준으로 이름을 바꾸고 1930년 부인 최이권 씨와 결혼 했다. 미국 이름은 조지 백이다.

이후 연희전문대에서 강의 하던중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미국으로 감. 귀국 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종로경찰서에 수감 나중에 서울대에서 교수직을 했으나 사임하고 연희전문대로 가서 후에 연희대 초대 총장이 됐다. 연희대에서 남여공학으로 학교를 만들고 군정때에는 조선교육 자문위원을 했다.

1950년 5월 2대 교육부 장관이 된 후 의무교육제 도입, 지방국립대 설립, 교육자치제 설립, 교육이념으로 ‘홍익인간’을 제의 했다. 대한민국교육의 주춧돌을 세웠고 “아무리 전쟁중이라도 교육은 중단 되어서는 안된다. 어디든(산, 들, 강) 교육을 해야 한다. 교제가 없으면 인생을 가르쳐라”고 했다.

대통령 권한 대행을 했고 참의원 의장을 했다고 전하며 마무리는 조병화 시인의 시로 ‘늘 혹은 때때로 생각나는 사람’시를 읊으며 강연을 마무리 했다.

이날 행사에는 포토맥 포럼 회원 30여 명이 참석했고 권세중 워싱턴 총영사는 인사말에서 “처음 워싱턴에 와서 포토맥 강연에 참석했고 3년이란 시간이 지났다. 그동안 도와 주시고 함께 해주신 것에 감사드린다”고 했다.

하이유에스 코리아 이태봉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