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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형 직전의 마리 앙투아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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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치와 방탕의 상징에서 비극의 여왕으로 [역사&오늘]

<<10월 16일, 마리 앙투아네트 기요틴으로 처형>>

1793년 10월 16일, 프랑스 국왕 루이 16세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콩코르드 광장에서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프랑스 대혁명의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비극적인 죽음을 맞았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1755년 오스트리아의 여황제 마리아 테레지아의 딸로 태어났다. 14세의 어린 나이에 프랑스 왕세자 루이 16세와 정략결혼을 위해 프랑스로 건너갔다. 몇 년 후 남편이 왕위에 오르자 마리 앙투아네트는 프랑스의 왕비가 됐지만, 프랑스 문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즐기며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

18세기 후반 프랑스는 심각한 경제난과 사회 불안에 시달리고 있었다. 귀족들의 사치와 부패는 백성들의 불만을 더욱 증폭시켰다.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자 마리 앙투아네트와 루이 16세는 혁명 세력에 의해 체포되어 투옥됐다. 혁명 정부는 왕비를 국가 부도와 혁명을 부추긴 죄목으로 기소했고, 결국 그녀는 단두대에서 처형당했다.

오랫동안 마리 앙투아네트는 역사 속에서 악녀로 묘사되어 왔다. 그의 사치스러운 생활과 정치에 대한 무관심은 프랑스 혁명의 주요 원인으로 지목됐고, 그는 프랑스 혁명의 실패 책임을 전가당하는 존재였다.

최근 역사학자들은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기존의 평가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그의 사치스러운 생활은 당시 귀족 사회의 일반적인 모습이었으며, 정치에 대한 무관심 또한 당시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고려할 때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마리 앙투아네트는 남편을 지지하고 왕권을 유지하려 노력했으며, 혁명 상황 속에서도 강인한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평가도 있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죽음은 프랑스 혁명의 상징적인 사건 중 하나다. 그가 사형당한 이유는 당시 프랑스 혁명의 격변 속에서 정치적인 상황과 대중의 감정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단순히 한 개인의 비극이 아니라 구체제의 몰락과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의미한다.

김정한 기자 <기사제공 = 하이유에스 코리아 제휴사, 뉴스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