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 포토맥 포럼은 13일 오전 11시 버지니아 애난데일 소재 설악가든 식당에서 춘원 이광수의 막내딸 이정화 박사를 초청하여 아버지 이광수에 대해 듣는 시간을 가졌다.
‘내가 만난 잊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제목의 강연에서 이정화 박사는 “아버지와는 고등학교 졸업 후 미국으로 유학 왔기 때문에 가깝게 지내지는 못했지만 경기도 사능에 계실 때 함께 2년동안 지냈고 그때 아버지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됐다. 지난 1992년 3월 아버지 탄생 100주년을 맞아 춘원연구회가 발족되고 포럼에 참석하여 아버지에 대한 연구가 제대로 진행 되고 있고 지금까지 학술대회가 열리고 있다”며 “아버지에 대한 연구가 제대로 진행 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춘원 이광수는 1892년 3월 4일 ~ 1950년 10월 25일)는 일제강점기의 언론인, 문학가, 시인, 평론가, 번역가이며 애국 계몽 운동가의 공로가 있다. 일제강점기 시절 독립 운동에 참여, 신한청년당과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했고, 임정 사료편찬위원회 그리고 신한청년당의 독립운동지 신한청년(新韓靑年)에도 주필로 참여했다. 그는 일제강점기에서 언론인 활동으로 동아일보 편집국장과 조선일보 부사장을 지냈고 또한 문학 번역가로도 활동하며 영미권의 작품을 한국어로 번안하여 국내에 소개하기도 했다. 순한글체 소설을 쓰는 등 소설 문학의 새로운 역사를 개척하기도 한 인물로 평가되며, 소설가로는 구한 말과 일제강점기 시대 동안 ‘만인의 연인’이라는 별명과 함께 청소년 남녀 문인들의 우상이었고, 최남선, 홍명희와 더불어 조선의 3대 천재로 대표되었던 인물이었다.
1909년 첫 작품 《사랑인가》를 발표한 이후 일본 유학 중에 소설과 시, 논설 등을 발표하였다. 귀국 후 오산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망명, 1919년 도쿄의 조선인 유학생의 2·8 독립 선언을 주도했으며, 2·8 독립 선언서를 기초한 후 3·1 운동 전후 상하이로 건너가 상하이 임시정부에 참가하고 그후 독립운동지 신한청년 등에서 주필을 역임하였다. 임시정부의 일원으로 활동하며 대한의 독립의 정당성을 세계에 홍보하려 노력하였으며 임시정부에서 발간하는 기관지인 《독립신문사》 사장을 맡아 활동했다. 하지만 허영숙이 상하이로 찾아와 귀국을 종용하자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을 접고 1921년 3월 귀국하여 허영숙과 결혼했다.
1922년 5월 개벽지에 《민족개조론》을 발표하여 ‘도덕적 타락’이 한민족의 쇠퇴의 원인이라며 비판했다. 1923년 《동아일보》에 입사하여 편집국장을 지내고, 1933년 《조선일보》 부사장을 거치는 등 언론계에서 활약하면서 《재생(再生)》, 《마의태자(麻衣太子)》, 《단종애사(端宗哀史)》, 《흙》 등 많은 작품을 쓰며 독립운동을 계속적으로 전개하였다. 해방 이후 백범일지의 교정, 윤문과 안창호의 일대기 집필을 직접 맡아 주관하기도 했다. 1949년 반민특위에 기소가 제기됐으나 석방되었고, 1950년 6월 한국 전쟁 때에 서울에 있다가 북한 인민군에 의해 납북되었다. 그간 생사불명이다가 1950년 만포에서 병사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정화 박사는 아버지가 남긴 말로 “내가 보고 싶으면 관세음 보살을 외우고 마음이 괴롭고 힘들 때는 성경책을 주며 성경을 읽어라”고 했다고 전했다.
이정화 박사는 이화여고 졸업 후 도미 하여 피츠버그대학, 펜실베니아 대학에서 생화학 박사를 받고 지금은 은퇴하여 필라델피아에 거주하고 있다. 이날 강연회에는 50여명이 참석했고 권세중 총영사가 인사말을 했다.
하이유에스 코리아 이태봉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