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제104주년 ‘3·1절’ 기념사에서도 ‘가치 외교’를 강조하며 일본과의 ‘협력’에 초점을 맞췄다. 역대 정부와 달리 과거사 문제와 관련한 대일(對日) 압박은 없었다.
윤 대통령은 1일 취임 후 첫 3·1절 기념사를 통해 “(1919년) 3·1운동 이후 한 세기가 지난 지금 일본은 과거의 군국주의 침략자에서 우리와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고 안보·경제, 그리고 글로벌 어젠다에서 협력하는 협력 파트너로 변했다”고 말했다.
윤 대통령은 “특히 복합위기와 심각한 북핵 위협 등 안보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한미일 간의 협력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며 “우린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는 국가들과 연대·협력해 세계시민의 자유 확대와 세계 공동의 번영에 기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윤 대통령의 이번 3·1절 기념사를 지배하는 핵심 키워드는 ‘일본과의 협력’이다.
역대 대통령들은 3·1절 기념사에서 일본과의 미래지향적 협력관계를 얘기하면서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등 일련의 과거사 문제에 대한 사죄·반성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윤 대통령은 이날 기념사에서 “오늘은 조국을 위해 헌신한 선열들을 기억하고 우리 역사의 불행한 과거를 되새기는 한편, 미래 번영을 위해 할 일을 생각해야 하는 날”이라며 ‘한일 양국이 과거를 잊지 않되, 미래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앞서 여권 핵심부에선 윤 대통령이 이번 기념사에서 1998년 ‘김대중-오부치(小淵) 선언’에 버금가는 ‘대일(對日) 독트린’을 제시할 것이란 얘기가 흘러나오기도 했다.
‘김대중-오부치 선언’이란 1998년 김대중 당시 대통령과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일본 총리가 채택한 ’21세기의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을 일컫는 것이다.
그러나 윤 대통령은 이번 3·1절 기념사에서 “우리 모두 ‘기미독립선언’의 정신을 계승해 자유·평화·번영의 미래를 만들어가자”고 말했다.
이는 100여년 전 비슷한 시기 발표됐던 다른 독립선언문이 조국 독립을 위한 대일(對日) 투쟁을 독려하는 내용이 주를 이뤘던 데 반해, 기미독립선언에선 ‘조선의 독립이 일본을 사로(邪路·그릇된 길)로부터 벗어나 책임을 다하게 하는 것이고 동양 평화를 중요한 일부로 삼는 세계 평화·인류 행복에 필요한 단계가 된다’며 공존·공생에 방점을 것과도 무관치 않아 보인다.
즉, 한일 간엔 현재 해법 논의가 진행 중인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배상 문제를 비롯해 일련의 과거사 문제가 존재하지만,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과 도발 위협 등에 맞서 “미래를 지키고 준비하기 위해서”는 자유민주주의 등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는 국가들이 함께할 필요가 있단 것이다.
그러나 윤 대통령이 이번 3·1절 기념사에서 일본의 침략과 식민지배 사실에 대한 구체적 언급 없이 “우린 세계사의 변화에 제대로 준비하지 못해 국권을 상실하고 고통 받았던 우리 과거를 되돌아봐야 한다”고 언급한 대목을 두고는 자칫 일본에 ‘면죄부’를 주는 것처럼 오독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일본 요미우리 신문은 징용공에 대한 언급이 빠진 것을 두고 부정적인 한국 내 여론을 고려했기 때문이라고 풀이했다.
요미우리신문은 윤 대통령이 강제 징용공 문제를 언급하지 않은 이유가 한국 내에서 징용공 배상안을 두고 ‘반발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것을 고려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윤 정부는 피고 측인 일본 기업 대신 행정안전부 산하 재단인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배상금의 상당 금액을 원고 측에 지불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한편 일본 언론들은 윤 대통령이 “일본은 과거의 군국주의 침략자에서 우리와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고 안보와 경제, 그리고 글로벌 어젠다에서 협력하는 파트너”라고 언급한 부분에도 주목했다.
우익 성향의 산케이신문은 ‘일본에 대한 비판이나 정책 및 현안에 관한 직접적 언급은 없었다’며 한일관계 개선을 노리는 윤 대통령의 대일 전략이라고 했다.
호사카 유지(保坂祐二) 세종대 교수도 “강제동원 문제에 대한 사과·배상 등에 대해 일본이 아직 호응하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단지 ‘협력’만 얘기해도 되는 건지 의문”이란 반응을 보였다.
호사카 교수는 윤 대통령의 3·1절 기념사 중 “한미일 협력 부분도 미일 양국이 대만 유사시를 대비하고 있음을 감안할 때 다소 안일하게 표현된 측면이 있다”고 평가했다.
노민호 기자, 권진영 기자 (기사제공 = 하이유에스코리아 제휴사, 뉴스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