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중산층의 현실은 숫자만 보면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 미국 증시는 사상 최고치를 반복해 경신했고, 401(k) 평균 잔액 역시 역대 최고 수준을 기록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벌금을 감수하며 은퇴 연금을 중도 인출하는 미국인이 급증하고 있다는 점은 단순한 경기 논리로 설명되지 않는다.
미국 S&P500 지수는 2025년 한 해 동안 39차례나 사상 최고치를 갈아치웠다. 같은 기간 401(k) 평균 잔액은 약 14만4000달러로 집계됐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59.5세 이전 인출 시 10%의 벌금과 소득세를 부담해야 하는 ‘긴급 인출’은 불과 몇 년 새 3배 이상 늘어났다. 평균 수치는 상승했지만, 중위값은 3만8000달러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점에서 미국 중산층 내부의 격차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미국에서 401(k)는 한국의 퇴직연금보다 훨씬 절대적인 존재다. 사회보장연금(Social Security)만으로는 은퇴 후 생계 유지가 어렵기 때문이다. 월 평균 수령액은 약 1800달러로, 대도시 기준 월세조차 감당하기 힘든 수준이다. 결국 중산층에게 401(k)는 ‘선택형 투자’가 아니라 사실상 마지막 안전망에 가깝다.
문제는 이 안전망이 빠르게 붕괴되고 있다는 점이다. 팬데믹 시기 정부 지원금과 소비 위축으로 쌓였던 ‘초과 저축’은 이미 2023년을 전후해 바닥이 났다. 이후 의료비, 주거비, 교육비 부담이 한꺼번에 몰리면서 신용카드 부채가 급증했고, 감당이 어려워진 가계는 결국 연금 인출로 이어지고 있다. 실제로 401(k) 중도 인출 사유의 다수는 주식 투자가 아닌 렌트 체납, 의료비, 학비 등 생존 비용이다.
여기에 신용카드 금리 상한 논의까지 더해지면서 상황은 더욱 복잡해지고 있다. 금리를 제한하면 단기적으로 이자 부담은 줄어들 수 있지만, 금융권이 저신용자 대출 자체를 차단할 경우 중산층 하위 계층은 신용 접근권을 잃게 된다. 신용이 막히면 다음 단계는 연금 인출이 되고, 그마저도 어려우면 파산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이 지점에서 한국과의 차이가 뚜렷해진다. 한국 역시 퇴직연금(IRP, DC형)의 중도 해지가 늘고 있지만, 상당 부분은 주택 구입이나 이직 과정에서 발생한다. 무엇보다 국민연금이라는 강제적 공적 연금이 존재해 최소한의 노후 소득은 유지된다. 미국처럼 “연금을 깨지 않으면 당장 집에서 쫓겨나는” 구조는 상대적으로 드물다.
그러나 한국이 안심할 상황도 아니다. 퇴직금을 연금으로 유지하지 못하고 일시금으로 소비하는 관행, 고령화 속도 대비 낮은 연금 소득 대체율, 의료·주거 비용 상승은 미국의 문제를 ‘미래형 경고’로 만든다. 미국의 401(k) 인출 급증은 단순한 개인 선택이 아니라, 중산층 안전망이 얼마나 빠르게 허물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신호다.
전문가들은 평균 수치보다 중위값과 인출 통계를 봐야 한다고 지적한다. 자산 시장은 호황이지만, 그 혜택이 모든 계층에 고르게 전달되지 않는 구조에서는 연금마저 생존 자금으로 전락할 수 있다. 미국 중산층의 연금 인출 증가는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니라, 연금 제도의 본질을 다시 점검해야 한다는 경고에 가깝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