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패총(貝塚, 조개더미)이 발견 되면서 신석기 시대부터 사람들이 거주한 것으로 밝혀진 가거도.
조선시대에는 왜구의 약탈과 범죄자들이 도망가서 사는 것을 막기 위한 공도정책(空島政策)으로 본토로 강제 이주 당하기도 했지만 1580년 경부터 다시 이주를 시작한 백성들은 지금까지 대한민국 최서남단 영토를 지키고 있다.
만약 백성들이 거주하지 않았다면 지리상 한반도 보다 더 가까운 중국에서 독도처럼 자기의 땅이라고 우기고 있을지도 모른다.
가거도(可居島).
가히 사람이 살만한 섬이라 이름 지어졌다지만 지은이에게 묻고 싶다. 정말 사람이 살만한 섬이었는지?, 정말 조선의 백성으로 생각했었는지?
가거도는 지금도 생명수와 같은 물 부족과, 육지로부터 공급되어야 하는 생필품 부족으로 주민 감소 현상은 계속 이어져 현재 299세대, 413명만 주민으로 등록되어 있다.
토박이 주민에 따르면 1980년 1천명을 기점으로 차츰 줄어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섬이나 주민 모두 육지만 바라보고 있는 가거도.
조선 인문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가히 아름답다고 할 만하다’는 뜻의 가가도(可佳島)로 기록될 정도로 아름다운 섬, 정부로부터 ‘2023년 올해의 섬’으로 지정된 가거도를 찾아 이 섬의 과거와 미래를 지키는 사람들을 만나봤다.
<<가거도초등학교·흑산중학교 가거도분교 임민혁 선생>>
가거도에는 유일무이한 학교가 있다. 학교 정식 명칭은 ‘가거도초등학교신안흑산중학교가거도분교장’으로 전남에서 가장 긴(20자) 이름의 학교이다.
순천대학교를 졸업한 임민혁(25세) 선생은 유치부 포함 14명의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들을 돕고 있다.
2급 중등학교 교사 자격증을 가진 그가 육지 학교의 좋은 자리를 버리고 귀향하여 보조 선생이 된 이유는 순전히 고향 사랑과 아버지 사업을 돕기 위해서다. 아버지 임진욱 씨는 가거도에서 가장 큰 둥구펜션과 식당을 운영 중이다.
대 도시가 아닌 섬에 태어나야만 했던 숙명을 운명처럼 받아 들인 그는 지금 후배 양성을 통한 지역사회 개발과 낙후된 가거도를 최고의 관광지로 개발하는 원대한 꿈을 꾸고 있다.
<<가거도 어촌계장 조윤찬 씨>>
목포 동강고(현 홍고)를 중퇴한 조윤찬 씨(71세)는 현재 가거도에 남아 있는 해녀 3인 중 한 명인 부인 김혜자(64)와의 사이에 1남 3녀를 두고 있다.
가거도 다른 집 자녀들이 그렇듯 자녀들 모두 육지로 나가 공부한 후(해외유학?) 귀향하지 않고 서울, 강원도, 목포시 등지에서 살고 있다.
남해장 조윤찬 사장은 “장님인 할아버지 밑에서 자랐지만 총명하고 부지런한 부인 덕에 지금도 호강하며 살고 있다”면서 자수성가 한 것과 자녀들을 훌륭하게 키운 공을 모두 부인에게 돌렸다.
가거도 어촌계장인 그는 주민 생활의 가장 힘든 부분으로 ‘태풍’과 ‘식수문제’를 꼽았다. 그리고 자주 출몰하는 중국 어선은 가거도 어업 주민들에게 가장 큰 골치거리이다고 했다.
현재 주민들은 1구, 2구, 3구 마을의 각 구 정해진 어획 구역에서만 어업 활동을 할 수 있다.
<<주민 건강을 책임지는 유석현 보건의>>
유석현 보건의는 1998년 경남 창원에 출생했다. 2022년 연세대학교 의학과를 졸업한 후 전남도청 소속 공중보건 임기제 공무원으로 올해 4월 가거도 보건지소에 부임했다.
군대 대체 복무이기 때문에 다른 곳으로 발령 나지 않는 한 앞으로 12개월 동안 가거도 주민들의 건강을 책임져야 한다.
현재 가거도 보건지소에는 치과, 의과, 한의과 닥터 4명과 직원 4명이 근무하고 있고 모두 타지인이기에 3층 관사에서 거주하고 있다.
보건지소에서는 주민들의 간단한 혈액검사, 영상검사를 하고 있지만 MRI 검사 같은 정밀검사나 위증 환자들은 목포 큰 병원이나 서울의 튼 병원으로 보내는 임무를 맡고 있다. 생명이 위급한 환자일 경우 배나 헬리콥터로 이송된다. 서울까지 헬기 이동시간은 쾌청한 날 기준 40분이다.
<<주민센터 격인 가거도관리사무소에서 고향 주민을 위해 봉사하는 김혁재 공무원>>
5대 째 가거도에 살고 있는 김혁재 관리팀장은 인천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진학을 고민하던 중 갑자기 부친의 사망 소식을 듣고 육지의 삶을 포기하고 가거도로 귀향했다. 홀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서다.
가거도관리사무소에 공무직으로 취직한 그는 가거도 토박이로서 주민들의 아픈 곳, 가려운 곳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면서 지역사회를 잘 보살피고 있다. 그는 가거도에서 효자로 소문나 있기도 하다.
그는 “현재 가거도의 당면 과제로 관광객들이 버리고 가는 생활 쓰레기 처리 문제이다”고 했다.
가거도의 환경 보호를 위해서라도 하와이나 제주도 성산일출봉 처럼 입도세를 징수해야 하는 날이 곧 올 것 같다.
<<가거도 최 연장자, 김춘동 옹>>
김춘동(87세) 옹은 가거도에서 9대 째 살고 있는 산증인이다.
그는 외딴섬 가거도에서 일제 강점기와 6.25동란을 겪은 몇 안는 고령자 중에 한 분이시다. 일제 시대에는 어린 나이에 굴 파는 작업과 진지 구축 작업에 동원되어 죽도록 고생하셨다고 한다. 그때 장인어른이 모진 고초로 돌아가셨다고 지금도 일본을 원망하고 계신다.
6.25 때는 많은 청년들이 입대 고지서를 받고도 배가 출항하지 않아 많은 청년듷이 병역 기피자로 몰리기도 했다고 전한다. 즉 인터넷상으로 떠도는 가거도가 너무 외져 6.25 사변 끝날 무렵에야 전쟁이 난 줄 알았다는 것은 과장된 것이다.
목선으로 고기 잡이를 하여 키운 3남매는 다들 서울에서 살고 있어 자주 보지 못하는 것이 한이다고 하신다.
독거노인인 그는 국민연금 30만원, 장애수당 6만원, 기초생활비 20만원 등 총 56만원의 정부 지원금으로 생활하고 있다. 그 외 3개월마다 지급되는 양곡 20Kg으로 아침, 저녁만 손수 지어 드시고 계시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섬 백성들은 수탈의 대상이지 복지의 대상이 아니었지만 지금은 복지혜택 시스템은 잘 가동 중인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월 56만원의 지원금으로 전기 수도세와 약 값을 감당하고 나면 부식비는 늘 부족하여 점심을 거르고 계셨다.
<<가거도에 하나 밖에 없는 교회, 가거도교회 담임목사 박기선>>
창립한 지 100년을 자랑하는 이 교회는 소멸되어 가는 섬과 함께 비롯 쇠락해 가고는 있지만 박기선 목사(58)와 한현경 사모(55)의 노력으로 가거도 주민들에게 구원의 방주 역할을 잘 담당하고 있다.
한세대학원 목회학과를 졸업한 박기선 목사는 주로 농어촌 개척 교회 사역을 해오고 있다. 7년 전에 이 교회에 부임하여 사모님과 함께 마치 해외 선교지 같은 목회 사역을 해오고 있는 중이다.
가거도에 출장이나 관광 오신 성도들이 주일 성수 차 함께 예배드릴 때 가장 많은 은혜를 받고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