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동 원로목사 / 프로필
서울대학교 영문과, 전 청소년재단 이사장, 해외한인장로회(KPCA) 총회장 역임, 현 서울장로교회 원로목사, 전 워싱턴교역자회 회장, 전 워싱턴한인교회 협의회 회장, 목회학박사과정 수료, 워싱턴신학교(WTS) 기독교교육 박사과정 이수 중, 신학교 교수
화목한 사회를 소망하며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사전 출판사인 메리엄웹스터 출판사는 매년 자사의 단어 검색 빈도를 기반으로 ‘올해의 단어’를 선정하고 있는데, 이 출판사는 올해의 단어로 ‘양극화’(Polarization)를 선정했습니다. 이 출판사는 ‘양극화’를 “뚜렷이 구분되는 두 개의 대립으로의 분할”로 정의하며, “특히 집단 내지는 사회의 주장, 신념, 이해가 더 이상 연속선상에 있지 않고 양극단에 편중된 상태”라고 부연 설명하고 있습니다. 2024년에 미국에서 ‘양극화’가 대표적 단어로 선정된 데는 미국 대선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이민자와 낙태 그리고 동성애와 관련된 이슈에서는 공화당과 민주당이 매우 첨예하게 상반되는 양상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러한 양극화 현상은 유럽을 위시해 세계 여러 나라에서도 볼 수 있는 현상이며, 이 가운데서도 세계 챔피언을 뽑으라면 한국이 금메달감이라고 조심스럽게 점쳐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버드대학교 정치학 교수인 스티븐 레비츠키는 “세상 사람들이 한국 정치가 위험할 정도로 양극화됐다는 걸 알게 됐다. 이건 미국도 마찬가지다. 정치인들은 극단적인 행동을 하는 게 자신에게 정치적으로 이익이 된다는 걸 안다. 그런데, 그게 전체 시스템에 큰 피해를 준다. 그럼에도 많은 경우 사회는 민주주의를 잃고 나서야 정치인들이 더 나은 방법을 찾았어야 한다는 걸 뒤늦게 깨닫는다”고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빌려오지 않더라도, 인간은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사회적인 존재임을 아무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서로 어우러져 살아가야 하기에 우리가 살아가는 데는 자연히 관계라는 것이 매우 중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무인도에서 혼자 살지 않는 한 우리의 삶은 필연적으로 관계 속에서 진행되게 마련입니다. 어찌 보면 인생 자체가 관계의 연속이라고 해도 지나친 표현이 아닐 것입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부모와 관계를 맺습니다. 그리고 자라면서 형제자매 관계, 부부 관계, 친척 관계, 친구 관계, 이웃 관계, 직장동료 관계, 사업파트너 관계 등등 점차 관계의 영역을 넓혀갑니다. 그리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성직자와 성도들 간의 관계, 그리고 신도들과의 관계라는 특수한 관계도 존재합니다. 이렇게 거미줄처럼 복잡다기하게 얽히고설킨 인간관계에서 우리가 어떻게 처신하느냐 하는 것이 곧 성공과 행복의 관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관계란 한번 깨어지면 회복하는 데 많은 노력과 시간을 요합니다. 마치 교통사고와 같아서 사고는 눈 깜짝하는 사이에 일어나지만 사고를 수습하려면 많은 노력과 시간이 들어갑니다. 그래서 저는 인간관계는 마치 운전과 같다는 생각을 자주 해보곤 합니다. 운전할 때는 전후좌우를 두루두루 살펴보아야 합니다. 똑바로 앞만 보고 간다고 사고가 일어나지 말라는 법이 없습니다. 운전이 미숙해 보이는 자가 있으면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야 하고, 운전 연습생이라는 ‘Student Driver’라는 사인이 붙어 있으면 레인을 바꾸거나 서행하는 게 좋습니다. 그리고 난폭운전을 하는 자가 있으면 예방 운전을 해서 사고를 미연에 방지해야 합니다. 이것을 운전시험 교재에서는 ‘거리두기’(detachment)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만일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다면 아예 불필요한 갈등이나 충돌을 피하는 게 상책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이론적으로 안다고 해서 매번 갈등과 충돌을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근본적으로 평소에 이러한 갈등과 충돌을 피할 수 있는 실력을 배양해야 합니다. 요즘 흔히 하는 말로 내공을 쌓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 말씀을 교훈 삼아 부단히 영적인 훈련을 반복해야 합니다.
(빌립보서 2:2-3)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요약하자면, 한 마음을 품고, 겸손하게 처신하면서, 남을 존중해주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 이어지는 구절이 빌립보서 2:5-11절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로 시작되는 이 구절은 성경학자들이 “그리스도의 찬가”(Hymn of Christ)라는 이름을 붙인 유명한 구절입니다. 이 구절의 내용을 요약하면 예수님의 낮아지심과 높여지심입니다. 예수께서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성탄하셔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한없이 낮아시셨을 때 하나님께서 그분을 모든 것 위에 뛰어나신 분으로 높여주셨다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우리 모두가 날마다 매 순간 경험하는 바이지만, 한 마음이 된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몇십 년을 동고동락한 부부간에도 한마음이 되지 않아 갈등할 때가 있습니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일을 처리하는 방법도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목적이 같다면 그 목적을 위해서는 우리 각자의 생각과 방법을 잘 조화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조화시킨다는 말은 포기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필요하면 서로 양보도 하고 적절히 조정도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피차 다양성을 인정하면서도 합의점을 찾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저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이라는 한자 숙어를 좋아합니다. “서로 화합은 하지만 그렇다고 마음이 꼭 같아서는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물론 가장 바람직한 것은 마음조차도 완전히 하나가 되는 것이지만, 현실적으로 항상 그렇게 되기는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설령 서로 생각이 좀 다르더라도 자기의 주장을 끝까지 내세우지 말고 적절히 조화를 이루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관계의 하모니가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삶의 지혜입니다. 미국 사람들은 “Meet halfway”라는 말을 즐겨 씁니다. “중간에서 만나자”는 말입니다. 즉 서로 조금씩 양보하자는 뜻입니다. 그리고 정히 끝까지 의견이 갈릴 때는 “We agreed not to agree.”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서로 동의하지 않기로 합의했다”는 뜻입니다. 끝까지 자기주장만 옳다고 밀어붙이면 대립각이 생기고 급기야는 충돌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난 돌이 정을 맞기 마련입니다. 모나면 정을 들이댈 수밖에 없고, 그렇게 되면 파열음과 마찰음이 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사회가 뾰족하게 모난 돌들 대신 둥글둥글 원만한 수석들이 많아진다면 살벌한 사회가 아니라 살만한 사회가 될 것입니다. 성탄절을 맞아 이런 화목한 사회가 되길 소망해봅니다.
Number | Title | Date |
243 |
마음 가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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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1.11 |
242 |
모사재인 성사재천’(謀事在人 成事在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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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1.04 |
241 |
종말의 때를 대비하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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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28 |
240 |
화목한 사회를 소망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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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21 |
239 |
예수님의 서번트 리더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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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15 |
238 |
예수님의 비하(humiliation)와 승귀(exalt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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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07 |
237 |
예수님께 줄을 서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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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30 |
236 |
성경 속의 추수감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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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23 |
235 |
평범한 감사의 일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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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16 |
234 |
감사지수(GQ: Gratitude Quoti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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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09 |
233 |
분노를 다스리는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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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01 |
232 |
항상 개혁하는 교회(ecclesia semper reforman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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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6 |
231 |
업그레이드된 인간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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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19 |
230 |
한 사람의 영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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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12 |
229 |
시너지(synergy) 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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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5 |
228 |
이런 친구가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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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28 |
227 |
유머러스한 그리스도인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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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21 |
226 |
긍정적인 ‘마인드셋(minds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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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5 |
225 |
여호와 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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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07 |
224 |
여호와 치드케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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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31 |
223 |
여호와 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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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23 |
222 |
여호와 라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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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17 |
221 |
여호와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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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10 |
220 |
여호와 닛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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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03 |
219 |
여호와 이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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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27 |
218 |
세렌디피티 법칙(Serendipity La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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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12 |
217 |
프레임 씌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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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6 |
216 |
고난을 낭비하지 않는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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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28 |
215 |
자유는 거저 주어지는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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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22 |
214 |
집단이기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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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