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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동 목사의 신앙칼럼

강남중 기자

김재동 원로목사 / 프로필


서울대학교 영문과, 전 청소년재단 이사장, 해외한인장로회(KPCA) 총회장 역임, 현 서울장로교회 원로목사, 전 워싱턴교역자회 회장, 전 워싱턴한인교회 협의회 회장, 목회학박사과정 수료, 워싱턴신학교(WTS) 기독교교육 박사과정 이수 중, 신학교 교수



분노를 다스리는 지혜



요즘 한국의 몇몇 국회의원들을 보면 분노 바이러스에 감염된 자들 같이 시도 때도 없이 고함을 질러대고 상대방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모욕적인 거친 언사를 거침없이 내뱉는 모습을 심심찮게 목격할 수가 있습니다. 이들의 모습은 분노를 넘어 격노라고 해야 적절한 표현일 것입니다. 마치 브레이크 없는 차량처럼 질주에 질주를 거듭하고 있습니다. 면책특권이라는 알량한 완장 하나 둘렀다고 위아래도 모르고 ‘꼬대기는’ 모습은 차마 보기조차 민망스러울 정도입니다. 그런가 하면 대통령이 욱하며 버럭 격노했다더라, 그래서 아랫사람들이 말 한 마디 잘못했다가 시쳇말로 죽사발이 되었다더라, 그러다 보니 이제는 마땅히 해야 할 말도 미처 하지 못하고 슬금슬금 눈치만 살피며 어르신 심기경호에 급급하고, 급기야 재바르게 복지부동의 보신(保身) 모드로 전환했다더라는 한심스러운 말도 간간이 들려옵니다.

화를 낸다고 문제가 풀리는 것도 아닐뿐더러, 화내는 사람이나 화를 받아내야 하는 사람 모두에게 분노는 득보다 실이 큽니다. 격노하면 일이 자기 뜻대로 풀리는 것처럼 착각합니다. 눈앞에서만 복종할 뿐 뒤에서는 손가락질하고 욕하는 면종복배(面從腹背)를 자초하는 미련한 행위입니다. 분노를 당하는 자의 입장은 마치 땅속에서 이글이글 꿈틀대는 마그마와 같은 심정일 것입니다.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가슴에 품고 있는 셈입니다. 지도자의 권위만 깎일 뿐 도무지 위신이 서질 않습니다. 칼이 두려운 건 칼집에 들어 있을 때입니다. 일단 휘둘러버리면 칼의 위력은 사라지거나 감소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분노를 마음 속에 고이 간직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분노를 마음 속에서 숙성시켜 해소할 수만 있다면 정말 금상첨화입니다.

심리학적으로, 해소되지 않은 분노는 대부분 화병을 일으키게 됩니다. 화병은 특히 한국인들에게 유니크한 증상이어서, 한때 미국정신의학회에서 발간한 정신 질환 분류 책자(DSM, Diagnostic and Statistical Manual of Mental Disorders)에 ‘Hwa-Byung’이라고 그대로 음역해서 실리기도 했습니다. 화병을 일으키는 원인은 매우 다양합니다. 화병은 대체로 울분과 깊이 관련돼 있으며, 울분은 공정의 문제와 맞닿아 있습니다. 가끔 불특정 다수를 향해 무차별 총격을 가하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불공정이 원인인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서울대 보건대학의 조사에 의하면, 한국인의 거의 절반인 49.2%가 장기적인 울분 상태에 놓여 있다고 합니다. 이 정도면 가히 ‘울분 사회’라고 해도 지나친 표현이 아닐 것 같습니다. 한국은 민주화와 산업화를 동시에 이룬 몇 안 되는 국가 중 하나로서, 사실상 선진국의 반열에 진입했다고 볼 수 있는데, 왜 이렇게 울분 지수가 높은지 궁금합니다. 한국의 자살률은 OECD 국가 중 1위이며, 하루 평균 자살자 수가 거의 38명에 육박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부정적인 사태의 원인으로 심한 경쟁 심리가 자주 지적됩니다. 경쟁이 심한 사회다 보니 그 결과로 타인과의 비교가 일상화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상대적 박탈감, 상대적 빈곤감 등이 울분으로, 이 울분이 분노로 발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죽하면 학교에서 개근하는 학생들이 놀림감이 되고 있습니다. 학기 중에 여행을 가느라 어쩔 수 없이 결석을 하는 학생들은 비교적 부유한 가정의 자녀들인데,그럴 여유가 없으니 개근을 할 수 있다는 ‘웃픈’ 현실이 한국 사회의 일그러진 단면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분노를 조절한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미국 유수 대학의 MBA 과정에 ‘분노 조절’(Anger Management)을 정규과목으로 채택하고 있는 대학도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사회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분노조절장애가 심각한 마이너스 팩터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달리 생각해 보면, 분노 조절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보여주는 하나의 반증이기도 합니다. 잠언 16:32에서는 분노 조절이 어렵다는 것을 매우 적절한 비유를 통해 일깨워주고 있다.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옛날 성들은 매우 든든한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에 웬만해서는 빼앗기가 어려웠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든다면, 바벨론 제국은 고대 국가들 중에서도 매우 강성한 나라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벽의 규모도 어마무시했습니다. 성벽의 높이가 14m가 되었는데, 짧은 쪽의 성벽 길이는 18km, 긴 쪽은 72km나 됩니다. 성은 내성과 외성으로 되어 있었으며, 역사가 헤로도투스에 의하면, 내성과 외성 사이의 거리는 자그마치 네 마리 말이 끄는 사두마차가 양방향으로 다닐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견고한 성을 무너뜨리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아주 용맹한 용사들이라 할지라도 성을 무너뜨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자기 마음을 다스려 노여움을 드러내지 않는 자는 성을 빼앗는 용사보다 더 훌륭하다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분노를 다스리는 게 어렵다는 것을 실감 나게 표현하고 있는 속담입니다. 그리고 잠언 25:28에는 자기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는 자는 마치 무방비 상태에 노출되어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마음을 제어하지 아니하는 자는 성읍이 무너지고 성벽이 없는 것 같으니라.”

우리가 분노를 다스리지 못하고 분을 오래 품고 있으면 마귀가 무너진 마음, 무장해제된 마음의 틈을 타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할 수 있으니 해가 지기 전에 즉 하루가 다 가기 전에 속히 분을 풀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4:26-27)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홧김에 외도한다”는 속담도 있듯이 화를 계속 품고 있으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탄의 먹잇감이 되어 순간적으로 돌이킬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르게 되니 속히 화를 푸는 것이 지혜롭다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견문발검(見蚊拔劍)이라는 말이 있는데, “모기를 보고 칼을 뽑는다”는 뜻으로, 별치않은 일에 혈기를 부리는 미련한 행위를 경계하는 사자성어입니다.

(잠언 12:16) “미련한 자는 분노를 당장에 나타내거니와 슬기로운 자는 수욕을 참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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