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동 원로목사 / 프로필
서울대학교 영문과, 전 청소년재단 이사장, 해외한인장로회(KPCA) 총회장 역임, 현 서울장로교회 원로목사, 전 워싱턴교역자회 회장, 전 워싱턴한인교회 협의회 회장, 목회학박사과정 수료, 워싱턴신학교(WTS) 기독교교육 박사과정 이수 중, 신학교 교수
‘더함’ 신앙
요즘 ‘더함’이라는 말을 종종 듣게 됩니다. 더함교회, 더함한인교회, 더함선교회, 더함캠페인 등 이 말이 자주 등장하고 있습니다. 얼핏 영어 단어 같이 보이는 이 말은 산상수훈에서 따온 말인 게 틀림없어 보입니다. 만일 필자의 추측이 맞는다면, 이 말에는 ‘플러스’(plus)보다는 ‘모어’(more)의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부터 7장까지를 예수님의 산상수훈(山上垂訓)이라고 합니다. 산상수훈은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 교훈하는 내용입니다. 다시 말해서 기독교 윤리에 관한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가운데서도 가장 높은 수준의 윤리가 기록된 부분이 5장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이 바로 여기에 나옵니다. 아마 세상에서 이보다 더 높은 수준의 윤리는 찾아보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 말씀의 맥락에서 주신 말씀 중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5:47)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이 말씀 중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는 구절에서 ‘더함’이라는 말이 생겨난 것이라고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만일 너희가 너희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나은 것이 무엇이냐? 심지어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도 그 정도는 하지 않느냐? 서로 친한 사람들끼리만 인사하고 마음이 내키지 않는 사람들과는 눈도 맞추지 않고 냉랭하게 대하며 등을 돌린다면 믿지 않는 사람들과 하등 다를 바가 없지 않느냐?
예수님은 이 말씀에 앞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46절)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이 말씀도 역시 ‘더함’에 관련된 말씀입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게 마련입니다. 그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는 것은 상 받을 일은 아닙니다. 그 당시 죄인 취급을 받던 세리도 그런 정도는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당연히 해야 할 것을 하는 것으로는 하나님의 칭찬을 받을 수 없고, 하늘의 상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방인들이나 세리들이나 죄인들보다는 뭔가 다른 점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들보다는 ‘한 수 위’여야 합니다. ‘한 수 위’라고 하는 말은 ‘한 수 더 뜬다’는 것과는 정반대의 의미입니다. 한국교회 초기에는 믿는 자들이 과연 다르다, 정말 한 수 위구나 하는 칭송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시대가 지나면서 믿는 자들도 별 수 없구나 하는 핀잔을 듣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요즘에는 믿는 것들이 한 수 더 뜬다는 비아냥을 듣게 되는 가슴 아픈 현실을 목도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믿는 자들은 한 수 더 뜨는 자들이 되어서는 안 되며 한 수 위인 자들이 되어야 마땅합니다. 달리 말하자면,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과는 차별화된 삶을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한 차원 더 높은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요즘 교인들을 향해 ‘한 수 더 뜬다’는 비난을 받긴 하지만, 평균적으로 말해 믿는 자들이 불신자들보다 도덕적으로 더 악랄하지는 않습니다. 교회가 너무 많다는 비난의 소리를 종종 듣게 됩니다. 그러나 어떤 분이 말했듯이 감옥소가 많은 것보다는 교회가 많은 것이 더 낫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개개인을 두고 볼 때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그래도 믿는 자들이 안 믿는 자들보다 나으면 나았지 못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도 믿는 것들이 한 수 더 뜬다는 뼈아픈 말을 듣게 되는 것은 믿는 자들에 대한 기대치가 높기 때문일 것입니다. 불신자들도 믿는 자들에게 기대하는 바가 높은 게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 기대치에 못 미치다보니 이런저런 욕을 먹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함’의 신앙이 필요한 것입니다. ‘더함’ 신앙의 절정은 바로 원수 사랑입니다. 정말 실천하기 어렵지만 예수님의 명령이니 실천하도록 힘쓰고 애써할 것입니다. 육체적인 핍박이 없는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그리스인들이 져야 할 십자가 중의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마태복음 5:43-44)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원수는 사랑하기보다는 미워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나를 미워하는 자는 나도 미워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나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나도 맞받아쳐 저주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나를 모욕하는 자에게는 나도 그렇게 대하는 것이 자연스러운(natural)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러므로 본성을 거슬러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자를 위해 기도하려면 초월적인(supernatural) 힘이 필요합니다. 그 힘은 성령께서 주십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면서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민감하게 순응할 때 이런 초월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38-42)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Eye for eye, and tooth for tooth.')라는 말은 흔히 탈리오의 법칙(lex talionis)이라 해서 너무나 유명한 말입니다. 이 법은 피해자가 입은 피해와 꼭 같은 피해를 가해자에게 벌칙으로 부과하는 것으로서 동해보복법(同害報復法) 또는 동태복수법(同態復讐法)이라고도 합니다. 이 법은 세계 최고(最古)의 성문법인 고대 바빌로니아 제국의 하무라비 법전에 나오는 말로서 모세의 율법에도 이 탈리오의 법칙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탈리오의 법칙의 원래 취지는 개인의 과도한 사형(私刑, lynch)을 금지하고 법이 규정하는 한도 내에서 보복을 제한적으로 허용하는데 그 목적이 있음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은 이성보다는 감정이 앞서기 때문에 눈 하나 상한 것 때문에 자칫 상대방의 생명까지 해할 수 있으므로 법으로 보복을 제한한 것이 이 법의 원래 취지입니다. 그런데도 그 당시 유대인들은 이 법이 보복을 정당화하는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의 잘못된 생각을 바로 잡아주시면서, 할 수만 있다면 상대방에게 눈을 눈으로 이를 이로 갚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다운 태도라고 교훈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매순간 ‘더함’ 신앙을 마음 깊이 새기며 살아갈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부터 7장까지를 예수님의 산상수훈(山上垂訓)이라고 합니다. 산상수훈은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 교훈하는 내용입니다. 다시 말해서 기독교 윤리에 관한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가운데서도 가장 높은 수준의 윤리가 기록된 부분이 5장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이 바로 여기에 나옵니다. 아마 세상에서 이보다 더 높은 수준의 윤리는 찾아보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 말씀의 맥락에서 주신 말씀 중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5:47)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이 말씀 중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는 구절에서 ‘더함’이라는 말이 생겨난 것이라고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만일 너희가 너희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나은 것이 무엇이냐? 심지어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도 그 정도는 하지 않느냐? 서로 친한 사람들끼리만 인사하고 마음이 내키지 않는 사람들과는 눈도 맞추지 않고 냉랭하게 대하며 등을 돌린다면 믿지 않는 사람들과 하등 다를 바가 없지 않느냐?
예수님은 이 말씀에 앞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46절)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이 말씀도 역시 ‘더함’에 관련된 말씀입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게 마련입니다. 그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는 것은 상 받을 일은 아닙니다. 그 당시 죄인 취급을 받던 세리도 그런 정도는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당연히 해야 할 것을 하는 것으로는 하나님의 칭찬을 받을 수 없고, 하늘의 상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방인들이나 세리들이나 죄인들보다는 뭔가 다른 점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들보다는 ‘한 수 위’여야 합니다. ‘한 수 위’라고 하는 말은 ‘한 수 더 뜬다’는 것과는 정반대의 의미입니다. 한국교회 초기에는 믿는 자들이 과연 다르다, 정말 한 수 위구나 하는 칭송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시대가 지나면서 믿는 자들도 별 수 없구나 하는 핀잔을 듣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요즘에는 믿는 것들이 한 수 더 뜬다는 비아냥을 듣게 되는 가슴 아픈 현실을 목도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믿는 자들은 한 수 더 뜨는 자들이 되어서는 안 되며 한 수 위인 자들이 되어야 마땅합니다. 달리 말하자면,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과는 차별화된 삶을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한 차원 더 높은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요즘 교인들을 향해 ‘한 수 더 뜬다’는 비난을 받긴 하지만, 평균적으로 말해 믿는 자들이 불신자들보다 도덕적으로 더 악랄하지는 않습니다. 교회가 너무 많다는 비난의 소리를 종종 듣게 됩니다. 그러나 어떤 분이 말했듯이 감옥소가 많은 것보다는 교회가 많은 것이 더 낫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개개인을 두고 볼 때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그래도 믿는 자들이 안 믿는 자들보다 나으면 나았지 못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도 믿는 것들이 한 수 더 뜬다는 뼈아픈 말을 듣게 되는 것은 믿는 자들에 대한 기대치가 높기 때문일 것입니다. 불신자들도 믿는 자들에게 기대하는 바가 높은 게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 기대치에 못 미치다보니 이런저런 욕을 먹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함’의 신앙이 필요한 것입니다. ‘더함’ 신앙의 절정은 바로 원수 사랑입니다. 정말 실천하기 어렵지만 예수님의 명령이니 실천하도록 힘쓰고 애써할 것입니다. 육체적인 핍박이 없는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그리스인들이 져야 할 십자가 중의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마태복음 5:43-44)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원수는 사랑하기보다는 미워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나를 미워하는 자는 나도 미워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나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나도 맞받아쳐 저주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나를 모욕하는 자에게는 나도 그렇게 대하는 것이 자연스러운(natural)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러므로 본성을 거슬러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자를 위해 기도하려면 초월적인(supernatural) 힘이 필요합니다. 그 힘은 성령께서 주십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면서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민감하게 순응할 때 이런 초월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38-42)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Eye for eye, and tooth for tooth.')라는 말은 흔히 탈리오의 법칙(lex talionis)이라 해서 너무나 유명한 말입니다. 이 법은 피해자가 입은 피해와 꼭 같은 피해를 가해자에게 벌칙으로 부과하는 것으로서 동해보복법(同害報復法) 또는 동태복수법(同態復讐法)이라고도 합니다. 이 법은 세계 최고(最古)의 성문법인 고대 바빌로니아 제국의 하무라비 법전에 나오는 말로서 모세의 율법에도 이 탈리오의 법칙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탈리오의 법칙의 원래 취지는 개인의 과도한 사형(私刑, lynch)을 금지하고 법이 규정하는 한도 내에서 보복을 제한적으로 허용하는데 그 목적이 있음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은 이성보다는 감정이 앞서기 때문에 눈 하나 상한 것 때문에 자칫 상대방의 생명까지 해할 수 있으므로 법으로 보복을 제한한 것이 이 법의 원래 취지입니다. 그런데도 그 당시 유대인들은 이 법이 보복을 정당화하는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의 잘못된 생각을 바로 잡아주시면서, 할 수만 있다면 상대방에게 눈을 눈으로 이를 이로 갚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다운 태도라고 교훈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매순간 ‘더함’ 신앙을 마음 깊이 새기며 살아갈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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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과 삼일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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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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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에서 영성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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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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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16 |
84 |
인간은 계획하고 하나님은 이루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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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06 |
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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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06 |
82 |
‘터치다운’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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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01 |
80 |
‘더함’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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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26 |
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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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26 |
78 |
상생(相生)의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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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19 |
7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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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19 |
76 |
협동과 협력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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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11 |
7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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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11 |
7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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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04 |
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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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04 |
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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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26 |
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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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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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21 |
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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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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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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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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혀 길들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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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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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