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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동 목사의 신앙칼럼

강남중 기자

김재동 원로목사 / 프로필


서울대학교 영문과, 전 청소년재단 이사장, 해외한인장로회(KPCA) 총회장 역임, 현 서울장로교회 원로목사, 전 워싱턴교역자회 회장, 전 워싱턴한인교회 협의회 회장, 목회학박사과정 수료, 워싱턴신학교(WTS) 기독교교육 박사과정 이수 중, 신학교 교수



상생(相生)의 지혜

미국은 벌써 한 달이 다 되어가는 이번 연방정부 셧다운(shutdown) 사태로 인해 경제적으로 엄청난 손해를 입고 있습니다. 이러다가 자칫 현재 누리고 있는 경제성장과 반짝 경기 호황마저 다 날려버리지 않을까 염려하는 자들도 많이 있습니다. 오바마 대통령 시절에도 셧다운이 있었고, 클린턴 대통령 시절에도 셧다운이 있었지만 이번처럼 길게 가지는 않았습니다. 현재 트럼프 대통령의 공화당과 낸시 펠로시의 민주당이 한 치의 양보도 없이 팽팽하게 대립하면서 심지어 치사한 치킨게임까지 벌이고 있습니다. 펠로시 하원의장은 모처럼 잡은 다수당의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며 오기를 부리고 있고, 트럼프도 대통령의 자존심을 굽히지 않고 집요하게 자기 고집을 밀어붙이고 있는 극도의 대치상황을 연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지켜보면서 머리 속에 스쳐가는 단어가 ‘상생’(相生)이라는 단어입니다. 이렇게 무한대치를 통해 어느 정도 자당(自黨)의 정치적 이득을 취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이로 인해 국민들은 몹시 힘들어하며, 특히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공무원들은 페이첵(pay check)을 받지 못해 당장 생활의 위협을 느끼며 불안해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조금씩 양보하면 모든 일이 잘 해결될 텐데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고 마치 마주보고 달려오는 기차처럼 무모한 정치놀음을 하고 있으니 국민들의 입장에서는 한심하기 그지없는 노릇입니다. 당장 정치적인 이득을 챙길 수 있을지는 모르나 멀리 내다보면 양당 모두에게 소탐대실(小貪大失)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5:15에서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서로 물고 먹으면 너도 망하고 나도 망하는 ‘lose-lose game’이 되고 맙니다. 우리는 피차 멸망하는 길이 아닌, 피차 사는 길을 모색하는 지혜 즉 상생의 길을 모색해야 합니다. ‘너 죽고 나 살자는 식’으로 해서는 절대로 상생을 이루어낼 수 없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유행하는 조크 중에 이런 조크가 있습니다. 유대인 가게 근방에 한국 가게가 들어오면 바짝 긴장한다고 합니다. 유대인들도 상술이 보통이 아니지만 한국인의 집요한 상술을 은근히 겁낸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국인 가게 가까이에 다른 한인 가게가 들어서면 속으로 쾌재를 부른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자기들끼리 가격경쟁을 벌이며 찧고 볶고 하다가 둘 다 망하게 될 게 뻔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가격담합을 해서는 안 되겠지만 상대방 가게를 죽이기 위해 제 살 깎아먹어가면서 죽기살기로 한다면 이 얼마나 미련한 짓입니까. 이것이 바로 “서로 물고 먹다가 피차 멸망하는” 행태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이번 사태를 지켜보면서 개인적으로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국경 장벽을 세우기 위해 50억 달러를 예산에 포함시키라고 할 때 민주당에서는 일언지하에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후에 25억 달러로 낮춰서 타협안을 제시했지만 펠로시 의장은 국경 장벽을 위해서는 한 푼도 할애할 수 없다고 극단적인 태도를 보였고 이로 인해 셧다운 사태는 장기국면에 돌입하게 된 것입니다. 만일 그 때 중재안을 받아들였다면, 아니면 어는 정도 적정선을 정해 타협을 했더라면 이 지경까지 오지는 않았을 걸 하는 아쉬운 마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사실 이번 사태로 인해 당초에 요구한 50억 달러를 훨씬 상회하는 경제적 손실을 입게 되었으니 이것은 결코 ‘윈윈 게임’(win-win game)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서로 타협하기 위해서는 ‘제로섬 게임’(zero-sum game)보다는 윈윈 전략을 펼 필요가 있습니다. 한쪽에서 모든 이득을 독식하고 한쪽은 아주 ‘폭망(暴亡)’해버린다면 이긴 편에서는 우선은 좋을지 모르나 결국 피차 망하는 길로 들어서게 되는 것입니다.

상생의 지혜는 서로 타협할 줄 아는데서 발휘될 수 있습니다. 자기 주장만 옳다고 하면서 끝까지 고집을 피운다면 타협은 있을 수 없고, 따라서 상생이 아니라 공멸의 길을 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칫 감정의 노예가 되기 쉽습니다. 이성적으로 냉철하게 따지기보다는 일단 감정이 이끄는 데로 끌려가는 성향이 다분합니다. 그러다 보니 일단 일을 저지른 후에 후회도 하게 됩니다. 감정적으로만 대응하면 타협이 되질 않습니다. 사실 이번 미국 연방정부의 부분 폐쇄도 이성적인 판단보다는 감정적인 대응이 문제였다고 생각합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을 향해 극단주의자들에게 휘둘리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수년 전에 공화당의 죤 베이너 하원의장이 당내 소수파인 티파티에 휘둘려 악수를 둔 사례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그 당시 이미 대법원에서도 합법적으로 인정된 사안인 오바마케어 건강보험법을 죽이기 위해 죽기살기로 사생결단 몽니를 부리다가 결국 중간선거에서 큰 낭패를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영어에 ‘meet halfway’라는 말이 있습니다. ‘중간 지점에서 만나다’ 즉 타협한다는 뜻입니다. 서로 의견이 상충될 때 한 발짝씩만 양보하면 문제가 원만하게 해결될 수 있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치킨게임’(chicken game)이라는 것도 있습니다. 치킨게임은 두 명의 경쟁자가 도로 양끝에서 서로 차를 몰고 정면으로 달려오다가 충돌 직전에 핸들을 먼저 꺾는 쪽이 지게 되는 게임을 말합니다. 누가 ‘비겁쟁이’(chicken)인지를 가리기 위해 1950년대 미국 젊은이들 사이에 유행했던 게임에서 유래한 말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게임에서 진 쪽은 ‘치킨’ 즉 비겁쟁이로 낙인이 찍히게 됩니다. 만일 이 게임에서 비겁쟁이란 말을 듣고 싶지 않아 서로 핸들을 꺾지 않는다면 겉으로는 둘 다 승자가 된 것 같지만 결과적으로는 둘 다 패자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죽이려다가 함께 죽을 수도 있는 무모한 짓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서로 무한대립을 해서는 절대로 문제가 원만하게 해결될 수 없습니다.


무한경쟁사회는 남을 죽여야 내가 산다는 생각이 팽배해있습니다. 그런 현상을 게(crab)에 빗대어 설명하기도 합니다. 게는 자기 위에 있는 동료의 발을 잡아 끌어내리는 습성이 있습니다. 요즘 한국 정부는 ‘더불어 잘 사는 사회’를 표방하고 있는데, 구호 자체는 참으로 높이 살 만합니다. 최근에 이와 괘를 같이하는 단체도 출범했습니다. 지난 11월 28일 더불어민주당 이해찬 대표가 발족시킨 ‘사무금융 우분투재단’이 바로 그 단체입니다. 이 재단은 강성 노조의 대명사였던 사무금융 노사가 불평등ㆍ양극화 해소를 위해 공동으로 기금을 출연해서 직장의 벽을 넘어 사회연대사업을 추진한다는 취지로 조직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단체명에서 ‘우분투’(UBUNTU)라는 좀 생소한 단어가 등장합니다. 이 말은 남아프리카 코사족(族) 언어인데 ‘네가 있어 내가 있다’라는 뜻으로서, 상생의 의미를 설명해주는 아주 적절한 단어라고 생각합니다.

아프리카 부족에 대하여 연구하던 어느 인류학자가 한 부족 아이들을 모아놓고 게임을 하게 했습니다. 나무 옆에 아주 싱싱하고 달콤한 딸기 바구니를 놓아두고 누구든지 먼저 뛰어간 아이에게 전부 주겠다고 했으나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의 손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손을 잡은 채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모두 둘러앉아 입안 가득히 과일을 베어 물고는 키득거리며 재미나게 먹었습니다. “왜 그렇게 하느냐?”고 묻자 ‘우분투’(UBUNTU)라는 말이 이구동성으로 터져 나왔습니다. “다른 아이들이 다 슬픈데 나만 기분 좋을 수 없잖아요? 우리가 함께 있기에 내가 있을 수 있으니까요.” 노벨 평화상 수상자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대통령을 지낸 넬슨 만델라가 강조한 사상이 바로 ‘우분투’였습니다.

교회야말로 그 어느 기관보다도 이 ‘우분트’ 정신을 실천해야 할 기관입니다. 한 울타리 안에서 함께 하나님을 섬기는 교인들은 평생동지를 넘어 ‘영생동지’입니다. 동고동락(同苦同樂) 공동체의 일원입니다.

(고린도전서 12:26-27)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나니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로마서 12:15)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