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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동 목사의 신앙칼럼

강남중 기자

김재동 원로목사 / 프로필


서울대학교 영문과, 전 청소년재단 이사장, 해외한인장로회(KPCA) 총회장 역임, 현 서울장로교회 원로목사, 전 워싱턴교역자회 회장, 전 워싱턴한인교회 협의회 회장, 목회학박사과정 수료, 워싱턴신학교(WTS) 기독교교육 박사과정 이수 중, 신학교 교수



하나님의 섭리

기독교 용어 가운데 ‘섭리’라는 말만큼 자주 사용하면서도 그 의미를 한 마디로 쌈박하게 설명하기가 어려운 단어도 없을 것입니다. 정말 알 듯 모를 듯 알쏭달쏭한 단어가 바로 ‘섭리’라는 단어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용어가 함의(含意)하는 내용이 너무나 광범하고 심오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섭리(攝理)’는 라틴어로 ‘프로비덴치아 디비나’(Providentia Divina, 영어:Divine Providence)인데, 한 마디로 세상과 우주만물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뜻을 의미합니다. 고대 여러 종교는 자연이나 우주의 운행이 맹목적인 우연에 기인한다고 생각했으나,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의지에 따른 필연적인 과정이라고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창조하신 만물을 그 창조의 목적에 합당하게 유지하고 보전하시기 위해 무궁한 지혜로 통치하시는데 이 모든 과정이 바로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이를테면, 계절에 따라 일정하게 반복되는 자연법칙이나 광대무변한 우주의 질서정연한 운행이 바로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입니다. 때로 꼭 필요할 경우 하나님은 이러한 ‘일상섭리’의 법칙을 깨고 ‘비상섭리’로 역사하시기도 합니다. 우리가 말하는 소위 ‘기적’이 바로 하나님의 비상섭리의 한 방편입니다.

성경 안에는 하나님의 섭리를 잘 보여주는 구체적인 사례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연계나 생태계나 일월성신(日月星辰)뿐만 아니라 우리 인간의 개인사나 국가의 운명에 관한 사례들도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먹이사슬은 생태계와 관련된 하나님의 섭리라고 할 수 있고, ‘하나님은 역사의 주인’이라는 역사관은 국가와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의 관점에서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특히 요셉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섭리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매우 적절한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동생을 노예로 팔아버린 후 수년 동안 그 사실을 아버지에게 속였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이 보시기에 악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결과적으로 그들의 죄악은 하나님의 적극적인 간섭과 개인으로 인해 좋은 결말을 맺게 됩니다. 요셉은 이집트로 끌려가 총리가 되었고, 7년 기근에 그의 가족들을 생명을 보존하여 이집트로 집단이주시켜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한 민족을 이루게 됩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은 요셉은 이렇게 위대한 신앙고백을 하게 됩니다.

(창세기 45:5-8)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또한 그는 전화위복케 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하신 섭리를 고백하며, 형들을 흔쾌히 용서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생계를 책임지겠다고 다짐하기도 합니다.
(창세기 50:19-21)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오리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이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로마서 8:28은 하나님의 섭리를 요약해주는 구절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어느 성경 주석가는 이 한 구절을 가리켜 ‘하나님의 국수틀’이라고 말한 바 있는데, 저는 이 말이 너무나 마음에 들어 자주 인용하곤 합니다. 국수틀에는 크기와 모양이 다양한 밀가루반죽이 들어가지만 마지막 나올 때는 일정한 크기와 모양의 오라기가 가지런하게 나오는 것입니다.
잠언 16:4은 “여호와께서 모든 것을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지으셨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 말씀은 자칫 하나님이 마치 악을 조성하시는 분처럼 오해될 소지가 있고 또한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다분한데, 로마서 8:28에 비추어 해석할 때 그런 위험성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혹 경우에 따라 악을 허용하실 수는 있지만, 절대로 악을 조성하시거나 절대로 스스로 악하실 수 없다는 신정론(theodicy)은 신학의 명백한 명제입니다. 하나님은 동방의 의인인 욥의 믿음을 시험하고 연단하시기 위해 사탄에게 일정한 범위 내에서 욥을 시험하도록 ‘허용’하신 적이 있습니다. 가룟 유다의 배반의 경우도 전화위복케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의 빛 아래서 이해할 때 올바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가룟 유다의 배반으로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게 되었고 그 결과로 인류가 구원을 받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주님은 그의 배반을 정당화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 사이에는 때로 팽팽한 긴장관계가 형성되기도 합니다. 인간이 자유의지로 행사한 모든 일들이 항상 면죄부를 받을 수는 없습니다. 인간은 자유의지로 행한 일에 대하여 마땅히 책임을 져야 합니다.

지금 지구촌은 코로나19로 인해 심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초강국 미국도 예외가 아니어서 국가 비상사태가 선포되고 이번 사태를 위해 엄청난 액수의 특별예산이 책정되었습니다. 이 사태가 얼마나 지속될 것인지에 대해서도 전문가들의 의견이 큰 차이로 엇갈리고 있습니다. 이번 사태를 지켜보면서 하나님을 믿는 자로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영국의 C. S. Lewis는, 고난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깨우는 사이렌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이번에 정통 기독교에서 이단시하는 신천지 신도들이 비난의 표적이 되고 있고, 차제에 진리와 비진리의 옥석(玉石)이 가려지는 계기가 될 수 있겠다는 희망도 있지만, 동시에 여러 면에서 기성교회들을 일깨우는 경종(awakening & warning sign)이라는 소리에도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한국의 정치와 관련해서도 이런저런 생각이 머리를 스쳐가지만 각자 생각이 다를 것이므로 구체적인 언급은 삼가려고 합니다. 바이러스 전염을 방지하기 위해 ‘사회적 거리두기’(social distancing)를 실천하는 것이 현명한 처사이겠지만 ‘심리적 거리두기’ 내지는 ‘정서적 거리두기’에는 신중을 기해야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런 때일수록 ‘하나님과의 거리 좁히기’에 힘써야 하리라 봅니다. “하나님은 한 마디 기도만큼의 거리에 떨어져 계신다.”(God is a prayer away.)라는 말도 기억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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