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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동 목사의 신앙칼럼

강남중 기자

김재동 원로목사 / 프로필


서울대학교 영문과, 전 청소년재단 이사장, 해외한인장로회(KPCA) 총회장 역임, 현 서울장로교회 원로목사, 전 워싱턴교역자회 회장, 전 워싱턴한인교회 협의회 회장, 목회학박사과정 수료, 워싱턴신학교(WTS) 기독교교육 박사과정 이수 중, 신학교 교수



자유와 방종

자유와 방종 사이에는 경계선이 모호한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이 둘을 구분하는 요소가 무엇일까를 생각해보면, 여러 가지 요소들이 있을 수 있겠으나 가장 확연한 것은 책임감일 것입니다. 자유를 맘껏 누리되 그러한 행위에 따르는 책임을 도외시한다면 그것은 자유가 아니라 방종입니다. 성경에는 자유와 방종을 매우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구절이 있습니다. 한 예를 소개해보겠습니다.
(갈라디아서 5: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 

이 말씀은 그 앞에 나오는 말씀이 자칫 오해를 불러올 소지가 있기 때문에 그러한 오해의 소지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1)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이 한 구절을 가리켜 성경학자들은 ‘그리스도인의 마그나 카르타(Magna Carta)’ 즉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대헌장’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마그나 카르타는 1215년 6월 15일에 영국의 존 왕이 귀족들의 강요에 의해 서명한 문서로서, 국왕의 권리를 문서로 명시한 문서입니다. 왕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문서화함으로써 전제군주의 절대권력에 제동을 걸기 시작했으며, 이로써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데 공헌한 문서라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의를 지니는 문서입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교회 교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복음의 진리를 전파했음에도 불구하고 율법주의를 신봉하는 유대주의 교사들의 사주를 받아 복음의 진리에서 떠나고 있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접하고 그들이 복음의 진리에 굳게 서 있기를 바라면서 간절한 마음으로 이 서신을 써 보냈습니다. 거짓 교사들은 순수한 복음의 진리에 물타기를 해서 예수를 믿는 믿음 외에 율법도 함께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는 이른바 ‘혼합주의’(syncretism)를 주입함으로써 복음을 희석시키는 잘못을 자행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자들을 향해 저주를 받게 될 것이라는 가혹한 언사를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1:9)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이렇게 복음의 순수성을 강조하면서도 그의 마음속에는 일말의 염려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율법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인가, 혹 이런 오해를 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구나, 이런 생각이 머리를 스쳐갔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되면 또 다른 신학적 오류인 ‘무율법주의 ’ 내지는 ‘반율법주의’(antinomianism)에 빠질 위험성이 다분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러한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 복음과 관련해서 맘껏 자유를 누리되 방종에 흘러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은 율법의 정신마저 폐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율법의 정신은 한 마디로 요약하면 ‘사랑’입니다. 비록 자유를 위해 부르심을 받았으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로 삼아서는 안 되며 오히려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육체’는 죄성(sinful nature)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육체의 기회’란 죄성을 타고난 인간이 지향하는 생각과 행동 일체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복음으로 자유롭게 되었다고 해서 죄성이 이끄는 대로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 이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자유에 흠뻑 취해 자칫 방종에 빠질 위험성이 있음을 사도 바울은 우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유’와 ‘종노릇’은 서로 상반된 개념입니다. 그러나 이 상반된 두 개념은 ‘사랑’ 안에서 서로 멋진 케미를 이루며 고차원의 도덕성으로 융합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14)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로마서 13:8-10)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십계명 중 인륜에 관련된 여섯 개의 계명은 ‘이웃 사랑’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부모공경은 부모사랑, 살인금지는 이웃의 생명 존중, 간음금지는 이웃의 순결 존중, 도적질 금지와 탐심 금지는 이웃의 유무형의 소유를 존중할 것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구약의 모든 계명의 요체를 ‘새 계명’이라는 이름으로 정리해주신 것입니다. 결국 ‘이웃 사랑’이 율법의 엑기스입니다.
(요한복음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바울은 이것을 ‘그리스도의 법’이라고 명명했습니다.
(갈라디아서 6:2)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우리가 복음을 받음으로 율법에서 자유로워졌지만 그 순간 동시에 그리스도의 법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역설적인 진리이지만, 그러나 그리스도의 법은 강압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원하는 마음에서 준행하는 법이므로 방종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줄 뿐만 아니라 참된 자유를 즐기며 책임적인 삶에로 이끌어주는 은혜로운 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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