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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동 목사의 신앙칼럼

강남중 기자

김재동 원로목사 / 프로필


서울대학교 영문과, 전 청소년재단 이사장, 해외한인장로회(KPCA) 총회장 역임, 현 서울장로교회 원로목사, 전 워싱턴교역자회 회장, 전 워싱턴한인교회 협의회 회장, 목회학박사과정 수료, 워싱턴신학교(WTS) 기독교교육 박사과정 이수 중, 신학교 교수



외식하는 자여!



외식하는 자여!
마태복음 23장에는 예수님께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해 매우 신랄한 어투로 연거푸 질책하시는 말씀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일곱 차례에 걸쳐 “화있을진저!”라는 말씀을 쏟아내십니다. “화있을진저!”라는 말은 “저주받을지어다!”라는 뜻입니다. 참 무서운 말씀입니다. 주님은 그 당시 외식(外飾) 즉 위선(僞善)을 일삼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향해 일곱 가지 저주 즉 ‘7화(七禍)’를 선언하십니다. 그 중 몇 가지만 인용해보겠습니다.
(13절)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25-26절)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소경된 바리새인아,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27절)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러한 말씀들은 좀 지나치다 싶을 정도의 독설(毒舌)로 들릴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그 분답지 않게 이들을 향해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라는 육두문자까지 동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불같이 화를 내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로 그 당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외식(外飾) 즉 겉으로 꾸미는 위선적인 행태를 못마땅하게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위선에 더해 백성들로부터 부당한 존경까지 받으려는 심산(心算)으로 겉치장을 경건한 신앙인처럼 꾸미기를 좋아하고, 늘 상좌(上座)에 앉아 거들먹거리기를 좋아했으며, 저자 거리에서 랍비라는 말을 들으며 에헴! 하기를 좋아했습니다. 그 당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연구하고 가르치고 복사하는 일을 하는 한편 율법을 자자구구 철저하게 지키려고 그 어느 부류보다도 노력하는 척했지만, 정작 그들의 살아가는 모습은 이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의식하기보다는 사람을 의식했습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경건한 자들처럼 보이려고 무던히 애썼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위선된 마음을 꿰뚫어보고 계셨습니다. 그들은 아주 두꺼운 위선의 탈을 뒤집어쓰고 있었던 것입니다. 원래 위선자를 의미하는 헬라어 ‘휘포크리테스’(ὑποκριτής)는 무대에서 가면을 쓰고 연기하는 배우를 가리키는 말이었고, 여기에서 영어 hypocrite라는 단어가 파생했습니다. 심리학에서 자주 사용하는 ‘페르소나’(persona)라는 용어도 원래 ‘탈’을 의미하는 라틴어인데, 배우에 의해 연기되는 등장인물을 의미합니다. 한국의 탈춤을 생각하면 이러한 개념들이 얼른 이해가 될 겁니다. 탈의 모양과 배우의 모습은 일치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위선은 이중적인 모습을 나타내는 행태를 의미합니다. 한 마디로, 언행일치가 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언행불일치(言行不一致) 또는 신행불일치(信行不一致)에 대해 매우 신랄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3:1-4)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느니라.”
여기서 ‘모세의 자리’란 회당 앞쪽에 따로 마련해 놓은 석재로 만든 특별석으로서 공식적으로 율법 교육을 맡은 율법 교사 중 가장 유력한 자가 이 자리에 앉아 율법을 강론했습니다. 이 자리에 앉아 모세의 율법을 강론하는 것은 매우 귀한 사역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언행일치가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세세한 조항까지 만들어 철저히 지키도록 백성들에게 가르쳤습니다. 자그마치 613가지의 조항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일반 백성들이 지키기엔 정말 ‘무거운 짐’이었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이 무거운 짐을 잔뜩 지워놓고는 자기들은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려 하지 않는 표리부동(表裏不同)한 자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특히 설교를 하고 성경공부를 인도해야 하는 목회자들은 이 말씀에 어느 정도 찔림을 받지 않을 자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장 자존심 상하는 말은 아마도 “당신은 위선자야!”라는 말일 것입니다. 솔직히 아는 대로 행하는 지행합일, 믿는 대로 사는 신행합일, 그 어느 것도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면 주님께 책망받게 될 것입니다. 중국 명나라 시절에 왕양명이라는 유학자는 그 당시 명나라의 학풍이 실천을 도외시하고 오직 허황한 공론으로 흐르는 풍조를 못마땅하게 여겨 지행합일(知行合一) 이론을 주창한 바 있습니다.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이 나란히 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의 학풍을 이어 이퇴계 선생도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비록 지(知)와 행(行)은 구분이 되지만, 마치 수레의 두 바퀴처럼 나란히 함께 나가야 한다.”
야고보서 저자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말씀대로 사는 것, 아는 대로 사는 것, 믿는 대로 사는 것,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래도 노력은 해야 하지 않을까요. 현재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습을 보며 다시금 생각해본 주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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