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동 원로목사 / 프로필
서울대학교 영문과, 전 청소년재단 이사장, 해외한인장로회(KPCA) 총회장 역임, 현 서울장로교회 원로목사, 전 워싱턴교역자회 회장, 전 워싱턴한인교회 협의회 회장, 목회학박사과정 수료, 워싱턴신학교(WTS) 기독교교육 박사과정 이수 중, 신학교 교수
예수님의 겸손을 본받읍시다
요한 깔뱅이 저술한 불후의 명저 『기독교강해』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성 어거스틴이 제자에게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덕목 가운데서 으뜸가는 덕목(德目)이 무엇입니까?" 그는 ‘겸손’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럼 두 번째로 큰 덕목은 무엇입니까?" 역시 ‘겸손’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세 번째는요?" 이번에도 역시 ‘겸손’이라고 꼭 같은 대답을 되풀이했습니다.
깔뱅은 이 유명한 이야기를 인용하면서 “신앙은 곧 겸손이다.”라고 정의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지녀야 할 가장 큰 덕목은 바로 겸손인 것입니다.
앤드류 머리(Andrew Murray)라는 성경학자는 『겸손』이라는 책에서 예수님의 겸손이 없었더라면 인류의 구원도 없었을 것이라고 하면서, 겸손이 기독교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덕목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늘의 높고 높은 영광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낮고 천한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태초부터 성부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성자 하나님께서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빌립보서 2:6에서도 본래 하나님의 본체 즉 하나님과 동일하신 예수님이 자신을 비우고 낮춰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조물주이신 하나님이 피조물인 인간으로 낮아진다는 것, 이것은 말이 쉽지 정말 엄청난 겸손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제 바야흐로 금년도 성탄절기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 절기에 우리가 예수님을 우리 마음 속에 모셔 들이기 위해서는 우리도 예수님처럼 겸손해져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을 구원하실 메시야로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그 분은 이스라엘의 수도인 예루살렘의 화려한 왕궁에서 태어나셔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동방박사들은 아기 예수님께 경배하기 위해 이스라엘의 수도인 예수살렘으로 찾아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미가 선지자가 예언한 대로 작은 시골 마을인 다윗의 동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으며, 그것도 말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한 평생 불편하게 사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시기 한 주간 전에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에도 갈기를 휘날리는 멋들어진 백마가 아니라 스가랴 선지자가 예언한 대로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온갖 모욕과 고통을 당하신 후에 수치스러운 십자가에 흉악범의 모습으로 처형되셨습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의 삶은 더 이상 내려갈 데가 없을 데까지 내려가신 겸손의 삶 그 자체였습니다. 우리도 이 예수님이 성탄하실 겸손의 구유를 준비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우리 마음 속에 예수님이 성탄하실 수 있을 테니까요.
사도 바울이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예수님의 낮아지신 삶을 언급하면서 “너희 안에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한 이유가 있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참으로 칭찬받을만한 교회였습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서두에서 이 교회를 생각할 때마다 그들이 복음사역에 동참한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드린다고 하면서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향해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하면서 각별한 애정을 토로할 뿐만 아니라 그들을 몹시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토록 은혜로운 교회 안에 사도 바울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한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유오디아와 순두게라는 두 여성도 간의 다툼이었습니다. 실명이 거론된 이 두 여성도는 아마도 이 교회의 지도급에 속하는 자들이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선임 권사들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이 교회는 루디아라는 여성이 주축이 되어 개척된 교회이기 때문에 아마도 여성 파워가 대단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어쨌든 바울이 실명까지 거론하면서 따끔하게 질책을 하며 예수님의 겸손을 본받으라고 권면한 것을 보면 이들의 다툼으로 인해 교회 분위기가 몹시 혼란스러웠던 것 같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한 주님을 믿고, 한 주님 안에서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고 사랑하며, 한 성령 안에서 교제할진대 서로 다투거나 우쭐대지 말고 겸손하게 한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2:1-4)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은 서로 격려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서로 위로하며 성령으로 교제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서로 친절과 동정을 베풀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한 마음 한 뜻으로 같은 사랑을 가지고 하나가 되십시오. 무슨 일이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며 자기 유익만 생각하지 말고 남의 유익도 생각하십시오. 그래서 내 마음 속에 기쁨이 넘치게 해주십시오.”
성도들 간에 다툼이 있을 때 목회자의 마음은 몹시 안타깝습니다. 서로 마음을 모아 힘을 합해 교회를 섬겨야 할 성도들이 서로 내가 잘났네 하면서 타투면 목회자의 마음은 몹시 불편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왜 다툼이 일어날까요? 서로 잘 났다고 으스대고 우쭐거리며 상대방을 무시하기 때문에 다툼이 일어납니다. 한 마디로 교만한 마음 때문에 다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겸손해질 때 한 마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겸손해진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기를 죽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기회 있을 때마다 제자들에게 겸손을 가르치셨을 뿐만 아니라 제자들의 발을 씻는 행위를 통해 겸손을 몸소 실천해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수난을 예고하셨음에도 서로 자리다툼을 하는 철없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는 충격요법으로 제자들이 평생 잊지 못할 교훈을 주신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세족식은 예수님의 유언적인 행위였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은 타고난 죄성으로 인해 그냥 가만히 내버려두면 겸손해지기 보다는 교만하게 되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겸손에 대한 교훈이 유난히 많이 있습니다. 특히 삶의 지혜를 다루는 인생독본인 잠언에 보면 겸손에 관한 교훈이 참 많이 나옵니다. 잠언은 오랜 세월을 지내오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일으키기 때문에 후세까지 살아남은 속담 모음집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주제에 대하여 속담이 많다는 것은 그 만큼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일으켰다는 뜻이고, 또 사람들이 그 부분에 있어서 취약하다는 것을 반증해 주는 것입니다.
잠언에 나오는 교만과 겸손에 대한 교훈을 몇 가지만 추려보겠습니다.
(11:2) “교만이 오면 욕도 오거니와 겸손한 자에게는 지혜가 있느니라.”
(13:10) “교만에서는 다툼만 일어날 뿐이라. 권면을 듣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
(16:18)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22:4)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응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
(29:23) “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게 되겠고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으리라.”
교만은 사탄의 생리입니다. 이사야 14장에 보면, 사탄의 정체는 원래 천사장 중의 하나인 루시퍼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처럼 높아지려는 교만한 마음을 갖게 되자 하나님의 징벌을 받아 하늘에서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우리 속에 교만한 마음이 고개를 쳐들 때 이것이 사탄의 유혹인 줄 알고 믿음으로 단호하게 물리쳐야만 합니다. 특히 우리는 영적인 교만을 조심해야 합니다. 주님은 누가복음 18장에서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를 통해 영적인 교만을 경계할 것을 교훈해주셨습니다. 영적인 교만은 다양한 모습을 띠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신앙이 더 좋다는 교만, 다른 사람보다 교회봉사 더 열심히 한다는 교만, 다른 사람보다 성경 더 많이 안다는 교만, 다른 사람들보다 기도 더 많이 한다는 교만, 스스로 성령충만하다는 교만, 다른 사람보다 헌금 더 많이 한다는 교만 등등 각양각색의 영적인 교만을 스스로 경계하지 않으면 사탄의 덫에 덜렁 걸려들게 됩니다. 저의 목회경험을 통해서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런 영적 교만자들로 인해 교회가 어려움을 당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려면 겸손해야 합니다.
교만은 어떤 교만이든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최후의 만찬석상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후에 이 의미를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야고보서 4:6-7, 10)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벧전 5:5-6)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예수님의 생애는 겸손과 존귀의 가장 좋은 본보기입니다. 그 분이 한없이 낮아지셨을 때 하나님은 그 분을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모든 자들이 그 분 앞에 무릎을 꿇게 하셨음을 항상 기억하면서 우리도 그 분을 본받아 겸손한 자가 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덕목 가운데서 으뜸가는 덕목(德目)이 무엇입니까?" 그는 ‘겸손’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럼 두 번째로 큰 덕목은 무엇입니까?" 역시 ‘겸손’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세 번째는요?" 이번에도 역시 ‘겸손’이라고 꼭 같은 대답을 되풀이했습니다.
깔뱅은 이 유명한 이야기를 인용하면서 “신앙은 곧 겸손이다.”라고 정의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지녀야 할 가장 큰 덕목은 바로 겸손인 것입니다.
앤드류 머리(Andrew Murray)라는 성경학자는 『겸손』이라는 책에서 예수님의 겸손이 없었더라면 인류의 구원도 없었을 것이라고 하면서, 겸손이 기독교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덕목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늘의 높고 높은 영광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낮고 천한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태초부터 성부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성자 하나님께서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빌립보서 2:6에서도 본래 하나님의 본체 즉 하나님과 동일하신 예수님이 자신을 비우고 낮춰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조물주이신 하나님이 피조물인 인간으로 낮아진다는 것, 이것은 말이 쉽지 정말 엄청난 겸손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제 바야흐로 금년도 성탄절기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 절기에 우리가 예수님을 우리 마음 속에 모셔 들이기 위해서는 우리도 예수님처럼 겸손해져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을 구원하실 메시야로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그 분은 이스라엘의 수도인 예루살렘의 화려한 왕궁에서 태어나셔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동방박사들은 아기 예수님께 경배하기 위해 이스라엘의 수도인 예수살렘으로 찾아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미가 선지자가 예언한 대로 작은 시골 마을인 다윗의 동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으며, 그것도 말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한 평생 불편하게 사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시기 한 주간 전에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에도 갈기를 휘날리는 멋들어진 백마가 아니라 스가랴 선지자가 예언한 대로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온갖 모욕과 고통을 당하신 후에 수치스러운 십자가에 흉악범의 모습으로 처형되셨습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의 삶은 더 이상 내려갈 데가 없을 데까지 내려가신 겸손의 삶 그 자체였습니다. 우리도 이 예수님이 성탄하실 겸손의 구유를 준비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우리 마음 속에 예수님이 성탄하실 수 있을 테니까요.
사도 바울이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예수님의 낮아지신 삶을 언급하면서 “너희 안에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한 이유가 있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참으로 칭찬받을만한 교회였습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서두에서 이 교회를 생각할 때마다 그들이 복음사역에 동참한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드린다고 하면서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향해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하면서 각별한 애정을 토로할 뿐만 아니라 그들을 몹시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토록 은혜로운 교회 안에 사도 바울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한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유오디아와 순두게라는 두 여성도 간의 다툼이었습니다. 실명이 거론된 이 두 여성도는 아마도 이 교회의 지도급에 속하는 자들이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선임 권사들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이 교회는 루디아라는 여성이 주축이 되어 개척된 교회이기 때문에 아마도 여성 파워가 대단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어쨌든 바울이 실명까지 거론하면서 따끔하게 질책을 하며 예수님의 겸손을 본받으라고 권면한 것을 보면 이들의 다툼으로 인해 교회 분위기가 몹시 혼란스러웠던 것 같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한 주님을 믿고, 한 주님 안에서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고 사랑하며, 한 성령 안에서 교제할진대 서로 다투거나 우쭐대지 말고 겸손하게 한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2:1-4)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은 서로 격려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서로 위로하며 성령으로 교제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서로 친절과 동정을 베풀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한 마음 한 뜻으로 같은 사랑을 가지고 하나가 되십시오. 무슨 일이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며 자기 유익만 생각하지 말고 남의 유익도 생각하십시오. 그래서 내 마음 속에 기쁨이 넘치게 해주십시오.”
성도들 간에 다툼이 있을 때 목회자의 마음은 몹시 안타깝습니다. 서로 마음을 모아 힘을 합해 교회를 섬겨야 할 성도들이 서로 내가 잘났네 하면서 타투면 목회자의 마음은 몹시 불편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왜 다툼이 일어날까요? 서로 잘 났다고 으스대고 우쭐거리며 상대방을 무시하기 때문에 다툼이 일어납니다. 한 마디로 교만한 마음 때문에 다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겸손해질 때 한 마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겸손해진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기를 죽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기회 있을 때마다 제자들에게 겸손을 가르치셨을 뿐만 아니라 제자들의 발을 씻는 행위를 통해 겸손을 몸소 실천해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수난을 예고하셨음에도 서로 자리다툼을 하는 철없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는 충격요법으로 제자들이 평생 잊지 못할 교훈을 주신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세족식은 예수님의 유언적인 행위였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은 타고난 죄성으로 인해 그냥 가만히 내버려두면 겸손해지기 보다는 교만하게 되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겸손에 대한 교훈이 유난히 많이 있습니다. 특히 삶의 지혜를 다루는 인생독본인 잠언에 보면 겸손에 관한 교훈이 참 많이 나옵니다. 잠언은 오랜 세월을 지내오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일으키기 때문에 후세까지 살아남은 속담 모음집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주제에 대하여 속담이 많다는 것은 그 만큼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일으켰다는 뜻이고, 또 사람들이 그 부분에 있어서 취약하다는 것을 반증해 주는 것입니다.
잠언에 나오는 교만과 겸손에 대한 교훈을 몇 가지만 추려보겠습니다.
(11:2) “교만이 오면 욕도 오거니와 겸손한 자에게는 지혜가 있느니라.”
(13:10) “교만에서는 다툼만 일어날 뿐이라. 권면을 듣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
(16:18)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22:4)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응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
(29:23) “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게 되겠고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으리라.”
교만은 사탄의 생리입니다. 이사야 14장에 보면, 사탄의 정체는 원래 천사장 중의 하나인 루시퍼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처럼 높아지려는 교만한 마음을 갖게 되자 하나님의 징벌을 받아 하늘에서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우리 속에 교만한 마음이 고개를 쳐들 때 이것이 사탄의 유혹인 줄 알고 믿음으로 단호하게 물리쳐야만 합니다. 특히 우리는 영적인 교만을 조심해야 합니다. 주님은 누가복음 18장에서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를 통해 영적인 교만을 경계할 것을 교훈해주셨습니다. 영적인 교만은 다양한 모습을 띠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신앙이 더 좋다는 교만, 다른 사람보다 교회봉사 더 열심히 한다는 교만, 다른 사람보다 성경 더 많이 안다는 교만, 다른 사람들보다 기도 더 많이 한다는 교만, 스스로 성령충만하다는 교만, 다른 사람보다 헌금 더 많이 한다는 교만 등등 각양각색의 영적인 교만을 스스로 경계하지 않으면 사탄의 덫에 덜렁 걸려들게 됩니다. 저의 목회경험을 통해서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런 영적 교만자들로 인해 교회가 어려움을 당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려면 겸손해야 합니다.
교만은 어떤 교만이든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최후의 만찬석상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후에 이 의미를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야고보서 4:6-7, 10)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벧전 5:5-6)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예수님의 생애는 겸손과 존귀의 가장 좋은 본보기입니다. 그 분이 한없이 낮아지셨을 때 하나님은 그 분을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모든 자들이 그 분 앞에 무릎을 꿇게 하셨음을 항상 기억하면서 우리도 그 분을 본받아 겸손한 자가 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Number | Title | Date |
118 |
의인의 고난과 악인의 형통
|
2020.05.02 |
117 |
나만 겪는 고난이 아닙니다
|
2020.04.25 |
116 |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인간이로다!
|
2020.04.18 |
115 |
회복탄력성(resilience)
|
2020.04.11 |
114 |
광야를 지날 때
|
2020.04.04 |
113 |
인생은 미완성
|
2020.03.28 |
112 |
하나님의 지혜
|
2020.03.21 |
111 |
하나님의 섭리
|
2020.03.14 |
110 |
일상의 감사
|
2020.03.07 |
109 |
에벤에셀
|
2020.02.29 |
108 |
약속을 붙드는 ‘아멘 신앙’
|
2020.02.22 |
107 |
역지사지(易地思之)
|
2020.02.15 |
106 |
황금률(黃金律)
|
2020.02.08 |
105 |
유니크한 목회, 유니크한 교회
|
2020.02.01 |
104 |
자유와 방종
|
2020.01.25 |
103 |
날마다 새롭게
|
2020.01.12 |
102 |
성경의 주인공이신 예수님(1)
|
2019.12.06 |
101 |
고난 중의 감사
|
2019.11.23 |
100 |
“목회는 상식으로 하는 거야!”
|
2019.10.10 |
99 |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
|
2019.10.05 |
98 |
외식하는 자여!
|
2019.09.28 |
97 |
값진 은혜와 값싼 은혜
|
2019.09.22 |
96 |
기다릴 줄 아는 믿음
|
2019.03.24 |
95 |
기다릴 줄 아는 믿음
|
2019.03.24 |
94 |
자존감을 가집시다
|
2019.03.16 |
93 |
자존감을 가집시다
|
2019.03.16 |
92 |
침체된 신앙에서 벗어납시다
|
2019.03.09 |
91 |
침체된 신앙에서 벗어납시다
|
2019.03.09 |
90 |
이민자의 세 가지 삶의 유형(AAA)
|
2019.03.03 |
89 |
이민자의 세 가지 삶의 유형(AAA)
|
2019.03.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