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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동 목사의 신앙칼럼

강남중 기자

김재동 원로목사 / 프로필


서울대학교 영문과, 전 청소년재단 이사장, 해외한인장로회(KPCA) 총회장 역임, 현 서울장로교회 원로목사, 전 워싱턴교역자회 회장, 전 워싱턴한인교회 협의회 회장, 목회학박사과정 수료, 워싱턴신학교(WTS) 기독교교육 박사과정 이수 중, 신학교 교수



명분과 실리 사이에서


햄릿의 “사느냐 죽느냐, 이것이 문제로다”라는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세상을 살다 보면 “명분(名分)을 취할 것인가 아니면 실리(實利)를 취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자주 부딪히게 됩니다. 명분을 취하자니 손해를 보게 생겼고, 실리를 취하자니 양심이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고, 그래서 이 둘 사이에서 갈등하며 난감해질 때가 자주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는 개인의 사생활에서도 일어나지만, 가정, 사회, 국가, 국제사회 등 조직체에서도 빈번하게 직면하게 됩니다.

명분과 실리를 논할 때 자주 언급되는 예가 조선 인조 때 일어난 병자호란입니다. 그 당시에
척화파(斥和派)와 주화파(主和派)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습니다. 12만 대군을 이끌고 온 청나라의 군대가 압록강을 넘어오고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신해 고립무원의 상태에 빠졌을 때 조정에서는 주화론자들과 척화론자들이 한 치의 양보도 없이 피 터지게 싸우고 있었습니다. 김상헌으로 대표되는 척화론자들은 반청의 기치를 드높이며 결사항전을 주장했고, 최명길을 주축으로 한 주화론자들은 청과의 화의(和議)를 통해 백성과 나라부터 살려놓고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마침내 최명길은 목숨을 걸고 적진으로 들어가 청과 대화의 물꼬를 트고 문제를 풀어나갔고, 비록 항복을 하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나라와 백성을 구했습니다. 김상헌도 최명길이 쓴 항복문서를 찢어버리는 행위 등을 통해 적어도 굴욕적인 항복은 아니라는 명분은 세우게 되었습니다. 결국 명분을 중시한 척화론자와 실리를 내세운 주화론자 간 적절한 타협과 견제가 병자호란의 변란을 지혜롭게 극복해낸 좋은 선례를 남겼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명분과 실리를 함께 아우르는 황금률을 찾을 수만 있다면 금상첨화이겠지만, 그런 경우는 흔치 않습니다. 어느 쪽을 강조하느냐에 따라 세상을 보는 관점은 크게 달라집니다. 이론적으로는, 명분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실리를 추구하고, 실리가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명분을 추구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해법입니다. 명분과 실리가 충돌할 때 어느 한쪽에 편향되거나 편중되지 않고, 이를 슬기롭게 헤쳐 나갈 수 있는 지혜와 용기가 필요합니다. 국가나 국제사회의 경우에는 더욱이 이러한 지혜와 용기와 결단이 요구됩니다. 명분에 치우쳐 실리를 놓쳐버리면 나라가 파탄에 빠질 위험성이 있고, 실리에 치우친 나머지 명분을 놓쳐버리면 원칙 없는 사회가 되어 자칫 도덕과 윤리가 땅에 떨어질 위험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범하는 것을 죄라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경이 분명하게 언급하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판단하는 것이 옳으냐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분명하게 명시하지 않은 사항에 대해서는 시비를 가리기가 애매한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주초문제도 그중의 하나입니다. 이런 문제는 초대교회에서도 논쟁거리였습니다. 이러한 논쟁을 가리켜 ‘아디아포라(adiaphora) 논쟁’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헬라어로서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들’’이라는 뜻입니다. 본질적으로 선악과 관련되지 않은 것들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사안들은 성도 각 개인의 책임감 있는 판단과 신앙 양심에 맡길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기본적으로 적용해야 할 원칙 즉 행동강령은 필요합니다. 고린도전서 10장에서 사도 바울은 이런 경우에 그리스도인이 취해야 할 행동강령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고전 10:23) “모든 것이 가(可)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비록 합법적(legal)이고 또 허용되는(permissible) 것이라고 해도 그러한 자유 행사가 다 유익한 것이 아니며 또 건설적인 것도 아니라는 뜻입니다. 특히 그 당시 이방교회 안에서 이슈가 되었던 것은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을 먹는 것과 관련된 문제였습니다. 사실 우상 자체가 가공적인 신이기 때문에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이라고 해서 먹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니 신앙 양심상 하등 가책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행위가 건덕상 도움이 되는지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먹어도 그만, 안 먹어도 그만인 ‘아디아포라’ 사안입니다. 이것은 반드시 어느 한쪽을 고수해야 하는 ‘원칙’에 해당하는 사안이 아닙니다. 특히 믿음이 연약한 자들을 위해서는 얼마든지 융통성을 발휘할 수 있는 사안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안에 대해서는 유연한 태도를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즉 명분보다는 실리를 앞세워야 할 사안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구원 교리에 있어서는 한 치의 융통성도 허용하지 않는 원칙주의자였습니다. 그러면서도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받도록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처럼, 이방인들에게는 이방인처럼 마치 ‘기회주의자(?)’처럼 처신했습니다. 원칙보다는 실리가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이번 한국의 총선 결과를 보면서 정부가 ‘원칙’을 고수하는 것은 좋으나, 시기상 어떤 사안에 대해서는 명분보다 실리를 생각하는 선거전략을 구사했더라면 하는 점이 못내 아쉽습니다. 명분을 고수하는 거야 하등 나무랄 게 없지만, 타이밍을 놓치고 뒷북을 친 점이 패인이 아니었을까, 제 나름의 분석을 해봅니다. 어떤 경우에는 민심이 큰 명분이 될 수 있습니다. 표를 잃을까 봐 두려워 지난 20년간 입 뻥긋조차 못했던 의료개혁은 총선 이후 3년 동안 밀어붙이면 될 일이었고 또 숨넘어가게 당장 한꺼번에 2천 명을 고집할 이유도 없었습니다. 호주 대사 임명도 초급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미국의 경우 대사 임명을 몇 년씩 미뤄두는 예가 비일비재합니다. 명분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실리를 챙기지 못한 것이 큰 패착(敗着)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을 본받아 목숨 걸고 지킬 명분은 사수하되,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실리도 챙기는 유연함을 발휘할 때 명분과 실리의 균형을 통해 황금률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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