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동 원로목사 / 프로필
서울대학교 영문과, 전 청소년재단 이사장, 해외한인장로회(KPCA) 총회장 역임, 현 서울장로교회 원로목사, 전 워싱턴교역자회 회장, 전 워싱턴한인교회 협의회 회장, 목회학박사과정 수료, 워싱턴신학교(WTS) 기독교교육 박사과정 이수 중, 신학교 교수
항상 개혁하는 교회(ecclesia semper reformanda)
10월 31일은 종교개혁일입니다. 올해는 마틴 루터가 1517년에 종교개혁의 기치를 든 지 507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루터는 성경의 권위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믿음을 강조했습니다. 그는 신학박사로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지만 정작 본인 자신은 아직도 구원의 진리를 깨닫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던 중 신학교 탑 연구실에서 로마서 강의를 준비하던 중 로마서 1:17의 말씀에 부딪히게 됩니다. 이것이 그의 생애를 완전히 뒤바꾸어 놓은 소위 ‘탑의 체험’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 한 구절 속에서 그는 드디어 복음을 발견하게 되었고 구원의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종교개혁의 모토는 ‘5 Sola’로 요약됩니다.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은혜(Sola Gratia),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 이 다섯 가지가 종교개혁의 5대 모토입니다.
종교개혁은 중세 시대의 부패한 교회를 새롭게 변혁시키고자 일어난 운동이었으며, 그래서 반항자(프로테스탄트, Protestant)로 낙인찍혔던 교회를 일명 ‘개혁교회’(Reformed Church)라고도 부릅니다. 그런데 대표적인 종교개혁자 칼뱅은 “교회는 이미 개혁된 교회이면서 동시에 항상 개혁되어야 하는 교회여야 한다"라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이것을 라틴어로 “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the church reformed, always reforming)라고 합니다. 이것이 개혁교회의 모토가 되었으며, 교회의 개혁을 언급할 때 항상 인용하는 유명한 문구가 되었습니다. 개혁된 교회는 한 번의 개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지속적으로 성령 안에서 말씀과 기도를 통하여 개혁되어져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종교개혁 당시 개혁된 교회는 오랜 세월을 지내오면서 원래의 의도와는 다르게 변질된 모습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초심을 가지고 잘못된 부분은 언제든지 개혁하는 용기와 결단이 요구됩니다. 단순히 전통과 관례에 얽매여 옛것을 고집스럽게 고수하려는 수구적인 생각에서 탈피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개혁에 대한 오해가 있을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론을 연구하는 많은 신학자들이 교회의 본질과 정체성보다는 교회의 기능과 역할을 더 중요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인간 영혼 구원을 위한 교회의 구속적 기능보다는 사회구조 개조를 위한 교회의 사회적 기능을 앞세웁니다. 교회가 교회 되는 것에 실패한 이유가 세상을 위한 교회가 급변하는 세상에 동화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다 보니 그들은 교회개혁의 모토인 “semper reformanda”(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를 교회가 세상의 현실과 상황에 개방적 자세를 가지고 순응하면서 항상 새로운 변화와 발전을 모색해야 한다는 의미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개혁자들이 생각한 “semper reformanda”의 의미는 이러한 주장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개혁자들이 요구한 개혁의 핵심은 항상 성경의 가르침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즉 “Back to the Bible”이 그들의 또 하나의 모토입니다. 개혁의 표준은 상황이 아니라 성경이었습니다. 칼뱅은 언제나 최종 권위를 성경에 두었습니다. 성경만이 최고의 기준이기에, 비록 칼뱅 자신이 했던 주장이라 할지라도 성경에 비추어보아서 잘못이 있다면 고쳐야 하는 게 개혁주의의 입장입니다. “성경이 가는 데까지 가고, 성경이 멈추는 데서 멈춘다”는 것이 개혁주의자들의 입장이었습니다. 요컨대, 종교개혁이란 ‘새로운 것’의 창조와 확립이 아니라 ‘성경적인 옛것’의 갱신과 재확립입니다. 인간의 빗나간 욕망과 잘못된 전통에 의해 덕지덕지 때가 묻어 원래의 모습이 가려진 상태에서 이른 바 “때 빼고 광내는 것”, 다시 말해서, 덧칠을 벗겨내고 원래의 모습이 드러나도록 하는 게 개혁입니다.
루터의 업적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한 것입니다. 그 당시 성경은 라틴어 성경이었고, 오직 성직자들만이 읽을 수 있는 ‘닫힌 책’이었습니다. 성경은 성직자들의 전유물이었고, 그들은 의도적으로 성경의 자국어 번역을 억제했습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루터가 자국어로 성경을 번역했다는 것은 얼마나 위대한 업적인지 모릅니다. 그는 ‘닫힌 책’을 ‘열린 책’으로 바꾸었습니다. 그의 업적은 독일 국민은 말할 것도 없고 기독교계 전반에 위대한 공헌을 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루터 덕분에 누구나 성경을 읽고 구원의 진리를 깨달을 수 있게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릅니다. 필요할 때마다 예비하신 자들을 통해 구원의 역사를 면면히 이어가시는 하나님의 역사에 감탄하며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산상수훈 중 마태복음 5장에는 예수님이 6가지 반제(反題, antithesis)를 말씀하신 내용이 기록돼 있습니다. 얼핏 보면, 전통적인 가르침과 대조적인 ‘새 율법’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전통적인 가르침을 뒤엎은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잘못된 이해와 관용적 적용에 대하여 하나님의 원래 의도(original intent)를 밝히시려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옛사람에게 말한 바를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마태복음 5:21)라는 말씀과 "이는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마태복음 7:29)는 말씀은 주님 자신이 개혁의 주체로서 권세를 갖고 계신 유일한 분이심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마태복음 5:17)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가지 구체적인 예를 든다면, 간음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27-20절). “간음하지 말라”는 십계명 중 일곱 번째 계명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계명을 주실 때는 단순히 외적인 간음 행위만을 염두에 두신 게 아니라 상대방의 순결을 해치지 말고 존중해주어야 한다는 포괄적인 의도가 내포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율법주의자들은 문자적으로만 해석해서 육적인 간음 행위만 하지 않으면 어떤 음란한 생각을 품더라도 전혀 죄가 되지 않는다는 식으로 해석하고 가르쳤던 것입니다. 이 외에도 모든 계명과 율법을 이런 식으로 해석하고 적용하다 보니 행위에만 치중하고 동기는 전혀 문제 삼지 않게 되었고, 이러한 태도가 급기야는 위선으로까지 발전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외식(外飾)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해 준엄하게 “화 있을진저!”라고 신랄하게 꾸짖으셨던 것입니다.
역설적이게도, 오늘날에는 교회가 개방적이고 진보적이지 않기 때문에 개혁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너무 개방적이고 진보적이기 때문에 개혁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를테면, 종교다원주의나 동성연애에 대하여 개방적이거나 진보적인 입장을 취하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개방적이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는 점을 직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가 '개혁'을 말할 때는 카멜레온의 변신처럼 시대적 유행을 따라 그 시대에 맞는 옷을 갈아입는 것을 의미하거나, 어떤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와는 반대로 옛것으로 돌아가는 회귀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칼뱅의 말처럼 교회는 늘 새로운 것이 교회를 미혹하지 않도록 성경의 내용에 확고히 서는 일에 게으르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의 권위에 앞서는 것은 그 무엇이든 개혁의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개혁은 현재 진행형인 ‘reformnda’입니다.
Number | Title | Dat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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