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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동 목사의 신앙칼럼

강남중 기자

김재동 원로목사 / 프로필


서울대학교 영문과, 전 청소년재단 이사장, 해외한인장로회(KPCA) 총회장 역임, 현 서울장로교회 원로목사, 전 워싱턴교역자회 회장, 전 워싱턴한인교회 협의회 회장, 목회학박사과정 수료, 워싱턴신학교(WTS) 기독교교육 박사과정 이수 중, 신학교 교수



여호와 삼마

지난 몇 주간에 이어 이번 주에도 여호와의 명칭에 대하여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다양한 이름으로 계시되어 있습니다. 한두 가지 이름으로는 하나님의 속성을 다 표현할 수 없기에 다양한 명칭을 통해서 하나님을 더 정확하고 풍성하게 알려주시기 위한 배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번 주에는 ‘여호와 삼마’(Jehovah-shammah)에 대하여 상고해 보려고 합니다. ‘여호와 삼마’는 "여호와께서 거기에 계신다"(the Lord is there)라는 뜻이며, 에스겔의 맨 마지막 절인 48장 35절에 등장하는 말로서, 에스겔 선지자가 환상 중에 본 하늘의 예루살렘에 붙여진 여호와의 명칭으로서, 무너진 이스라엘에 대한 비전과 희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사방의 합계는 만 팔천 척이라. 그날 후로는 그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 삼마라 하리라.” 앞부분에서 성전의 척수에 대해서 자세하게 다루고, 성전에서 수종을 드는 자들의 임무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다룹니다. 그리고 성회와 절기에 드릴 예물과 제사법에 대한 규례를 다루고, 새로운 땅에 대한 분배를 다루고, 이어서 그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 삼마’라 하리라고 했습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께 지은 죄로 인해 바벨론의 포로민이 됨으로써 여호와의 영광이 그들을 떠난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그들이 죄악의 길에서 돌이킨다면 예루살렘 성전에 있을 때에나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와 있을 때에나 변함없이 그들과 함께 하시겠다는 희망적인 약속에 감격해서 ‘여호와 삼마!’라고 소리 높여 외쳤던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거기 계신다”는 말은 자칫 하나님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거기는 계시고 여기는 계시지 않는 것처럼 오해할 소지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속성 중에는 인간과 공유하는 속성들도 있지만 하나님만이 지닐 수 있는 고유한 속성들도 있는데, 전지전능, 무소부재와 같은 속성은 하나님만이 지니고 계시는 고유한 속성입니다. 부소부재는 편재성(偏在性, omnipresence)이라고도 하는데, 하나님은 어디에든 계시는 분, 달리 표현한다면, 안 계시는 곳이 없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서는 특별한 경우, 특정한 사람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디든지 계시지만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어떤 특정 장소나 특정인에게 나타나 특별한 역사을 하시기도 합니다.

‘삼마’는 의미상 ‘임마누엘’과 같은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 ‘여호와 삼마’의 약속은 임마누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해 가장 명확하게 결정적으로 성취되었습니다. 히브리어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God with us)”라는 뜻입니다. 천사가 예수님의 수태고지(受胎告知)를 하면서 그분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임을 알려주었습니다(마태복음 1:23).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만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 인간과 함께 거하셨기 때문에 이 이름은 더없이 적합한 이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성육신(成育身) 자체가 임마누엘이지만, 그분은 우리의 삶 속에 늘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도와주시는 분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는 임마누엘 신앙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친히 자신의 임마누엘 신앙을 모범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말기에 제자들이 당국의 처벌을 두려워한 나머지 지레 겁을 먹고 예수님을 떠나 다 뿔뿔이 흩어지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도 인성을 지니신 분이라 아마도 배신감과 함께 홀로 남겨졌다는 적막감과 고독감을 느끼셨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임마누엘의 신앙으로 이러한 감정들을 극복하셨을 뿐만 아니라 제자들에게도 임마누엘의 신앙을 가질 것을 교훈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6:32-33)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유대인들이 참혹하게 학살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있었던 일화입니다. 비참하기 그지없는 상황 속에서 여호와 신앙에 투철했던 유대인이었지만 극심한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유대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동료들이 가스실에 끌려가 죽임을 당하는 모습을 보며, 어느 사람이 하나님을 원망하며 홧김에 수용소 벽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하나님은 어디에도 계시지 않는다(God is no where).” 그 글귀를 보자 사람들이 더욱 절망감에 몸부림쳤습니다. 그래서 한 유대인이 알파벳 ‘w’를 옮겨 “God is now here!(하나님은 바로 지금 여기에 계신다)로 바꾸어놓았습니다. 그러자 죽음에 직면한 많은 사람들이 다시금 희망을 붙들게 되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지상명령(至上命令)을 주시면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태복음 28:20).

하나님은 늘 우리와 함께 하시지만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하지 못하는 것, 그것이 문제입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의 ‘삼마’의 약속을 굳게 붙들고 늘 승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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