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유에스코리아뉴스

김재동 목사의 신앙칼럼

강남중 기자

김재동 원로목사 / 프로필


서울대학교 영문과, 전 청소년재단 이사장, 해외한인장로회(KPCA) 총회장 역임, 현 서울장로교회 원로목사, 전 워싱턴교역자회 회장, 전 워싱턴한인교회 협의회 회장, 목회학박사과정 수료, 워싱턴신학교(WTS) 기독교교육 박사과정 이수 중, 신학교 교수



프레임 씌우기



‘프레임(frame)의 법칙’이라는 게 있습니다. 프레임이란 단순히 ‘창틀’이란 의미이지만, 이 경우는 관점이나 생각의 틀을 의미합니다. 똑같은 상황이라도 어떠한 틀을 가지고 상황을 바라보고 해석하느냐에 따라 사람들의 행동이 달라진다는 법칙입니다. 인도의 시인 타고르가 어느 날 자기 집 마당을 쓰는 하인이 세 시간 넘게 지각을 하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당장 해고해버려야겠다고 단단히 벼르고 있었습니다. 그러고 있는데 3시간 후에나 하인이 허겁지겁 달려왔습니다. 그는 하인을 보자마자 그에게 빗자루를 내던지며 말했습니다. “너는 당장 해고야! 어서 이 집에서 썩 꺼져버려!” 그러자 하인은 빗자루를 집어 들며 겁먹은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주인님, 정말 죄송합니다. 어젯밤에 딸아이가 죽어서 아침에 묻고 오느라 늦었습니다.” 타고르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인간이 자신의 입장만 생각할 때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를 배웠다고 합니다.

요근래 미국이나 한국 사회에서 ‘프레임 전쟁’이 거세게 일고 있습니다. 상황을 바라보는 관점이야 제각각 자유라고 하지만, 문제는 서로 관점이 다른 진영끼리 피 터지게 싸우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이런저런 프레임을 만들어 상대방에게 덮어씌우고 비방하면서 적으로 몰아세우는 바람에 두 세력이 양분되어 극렬하게 반목하고 대치하는 상황이 거의 일상이 되어버렸습니다.

예수님도 프레임 씌우기의 희생자셨습니다. 민심이 예수님에게 쏠리자 당시 지배층인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질투가 나서 ‘신성모독 프레임’과 ‘로마 황제에 대한 반역 프레임’을 씌워 결국 십자가에 처형하게 만듭니다. 다윗도 민심이 원래 의도한 바와는 다르게 프레임 씌우기의 희생자가 된 적이 있습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치는 혁혁한 전과를 올리자 그의 인기가 하늘을 뚫을 정도로 치솟았습니다.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는 민심에 심기가 몹시 불편했던 사울 왕은 자기 사위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그를 없애버리려고 온갖 수법을 동원해 핍박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긴 세월 사울을 피해 도피자의 삶을 살아야만 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복음을 깨닫고 나서 구원은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얻는 게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다는 복음의 진리를 설파하다가 유대 율법주의자들의 미움을 받아 ‘변절자 프레임’과 ‘배신자 프레임’에 걸려들어 온갖 고초를 겪어야만 했으며, 이로 인해 그의 선교사역에도 엄청난 타격을 입었습니다.

꼭 같은 것을 보고서도 사람마다 관점이 다릅니다. 가령, ‘+’가 그려진 카드를 보여주면, 일반 학생들은 ‘덧셈 기호’라 하고, 산부인과 의사는 ‘배꼽’이라고 합니다. 목사는 ‘십자가’라고 하고, 간호사는 ‘적십자’라고 하고, 약사는 ‘녹십자’라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교통경찰은 아마 ‘사거리 교차로’라고 말할 것입니다. 모두 자기 입장에서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다른 사람이 ‘틀린’ 것이 아니고 ‘다를’뿐입니다.

요즘 방송에 자주 출연하는 정치 평론가들 사이에 ‘뇌피셜’이라는 말이 부쩍 자주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뇌(腦)'와 '오피셜(official)'의 합성어로, 자기 혼자만의 생각을 공식적으로 검증된 사실인 것처럼 주장하는 것을 뜻합니다. 비슷한 말로 '뇌내 망상'이란 말도 있습니다. 자기만의 주장에 빠져서 그것이 사실이라고 믿고 맹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비슷한 의미로 사용되는 또 다른 심리학 용어 중에 ‘확증편향(確證偏向, confirmation bias 또는 myside bias) )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경향이 있는데, 이러한 심리를 확증편향이라고 합니다. 즉 자신의 가치관, 신념, 판단, 기호, 성향 등에 부합되는 정보에만 주목하고 그외의 정보는 무시하거나 아예 관심조차 두지 않는 사고방식을 가리킵니다. 예를 들면,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하루 석 잔의 커피가 장수에 도움이 된다는 기사는 믿지만, 커피에 있는 카페인이 교감신경에 미치는 부작용에 관한 기사는 짐짓 무시하려고 합니다. 정치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을 보면, 자기가 지지하는 당에 대해 우호적인 기사나 주장은 일부러 찾아서 읽지만, 반대하는 당에 대한 우호적인 기사나 주장들은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요즘은 알고리즘이 이러한 경향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이런 확증편향이 강한 사람일수록 자신들의 잘못을 고치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자신들이 믿고 있는 게 팩트라고 맹신합니다.

사도행전 11장을 보면, 이른바 ‘베드로 청문회’ 내용이 기록돼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청문회가 열렸고, 청문회에 소환된 사람은 골수 유대인이었던 베드로 사도였습니다. 그가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 들어간 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상종하는 것이 위법이었기에 진상조사를 벌이게 된 것입니다.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소식이 예루살렘에 전해졌는데도, 이방인 집에 들어가 함께 음식을 같이 먹었다는 데에만 초점을 맞춘 전형적인 ‘프레임 씌우기’ 청문회였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베드로가 자초지종을 사실대로 설명하고 의장으로 회의를 주재했던 야고보의 지원 발언이 있은 후, 골수 유대인들도 그들이 가졌던 고정관념 즉 유대인들만 구원을 받는다는 생각이 바뀌게 되었고, 결국 다 함께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속에 성질이 고약한 개 두 마리를 키운다고 합니다. 선입견과 편견이라는 개입니다. 그런데 이런 개들을 마음 속에서 쫓아내는 비결이 있는데, 그것은 ‘일견’을 키우는 것입니다. 일견은 ‘백문이 불여일견’의 애칭입니다.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게 낫다”는 뜻입니다. 직접 보지 않고 들은 소문으로만 상대방을 판단하면 큰 실수를 범하게 됩니다. 소위 ‘카더라’ 통신의 문제점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아무렇게나 막말 잔치를 실컷 벌여놓고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나면 ‘아니면 말고’ 식으로 무책임하게 처신하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특히 후안무치의 끝판왕이라 할 만한 정치인들, 얼굴 가죽이 몇 겹인 철면피 정치인들 사이에서 이런 자들을 흔하게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잘못된 행태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의식적으로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뇌피셜이나 편향확증에 빠지지 않으려면 객관성과 함께 합리성을 유지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객관성과 합리성이 확보된다면 프레임 씌우기도 어느 정도는 용인될 수 있다고 봅니다. 이성적인 잣대로 판단해 볼 때 누가 봐도 이건 잘못되었다고 판단이 된다면, 그래서 어느 한 편에 서기로 했다면, 그것은 ‘프레임 씌우기’로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이를테면, 입만 열면 거짓말이요, 게다가 전과가 몇 범인데도 무조건 맹종한다면 그게 잘못이지 그런 자에게 ‘범죄자 프레임’ 씌우는 게 잘못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남을 비판하지 말라고 교훈하셨습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버리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마태복음 7:3,5). 그런데 이러한 교훈에 바로 이어서 하신 말씀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마태복음 7:6).



***** 칼럼의 내용은 본 신문사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