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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동 목사의 신앙칼럼

강남중 기자

김재동 원로목사 / 프로필


서울대학교 영문과, 전 청소년재단 이사장, 해외한인장로회(KPCA) 총회장 역임, 현 서울장로교회 원로목사, 전 워싱턴교역자회 회장, 전 워싱턴한인교회 협의회 회장, 목회학박사과정 수료, 워싱턴신학교(WTS) 기독교교육 박사과정 이수 중, 신학교 교수



자유는 거저 주어지는 게 아니다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이 길어지고 있는 가운데, 지난 6월 8일에 이스라엘군이 8개월 만에 자국 인질 4명을 구출하긴 했지만, 이번 작전으로 팔레스타인 정착촌 주민 중 최소 274명이 목숨을 잃었고 700명 이상이 다쳤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이 인질 구조를 이유로 또다시 팔레스타인 민간인을 대량 학살했다는 비판이 일고 있습니다. 물론 하마스가 이스라엘의 키부츠에서 열린 음악축제 현장을 기습공격하여 이스라엘 주민들을 인질로 끌고 감으로써 원인 제공을 한 잘못이 있긴 하지만, 4명을 구하기 위해 그토록 많은 자들을 희생시킨 것은 비난받아 마땅합니다. 이미 4만여 명에 달하는 민간인들이 사망하고, 9만여 명이 부상을 당했습니다. 압도적인 군사력을 지닌 이스라엘도 1,500명에 가까운 사망자와 5천 명에 가까운 부상자가 나왔습니다.

벌써 거의 2년 반에 접어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도 당장은 끝날 기미가 보이질 않습니다. 그런데 러-우 전쟁뿐만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촌 곳곳에서 우리가 미처 모르는 사이에 국가 간, 종족 간, 그리고 심지어 동족 간에 갈등과 분규와 전쟁이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온 인류가 그토록 평화를 염원하지만 전쟁의 소문은 날로 더 늘어만 가고 있으니 정말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사실 전쟁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적으로 보아도 우리는 살인자 ‘가인의 후예’입니다. 가인이 동생 아벨을 쳐 죽인 인류 최초의 살인사건도 비록 개인적인 사건이긴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전쟁의 한 모습을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이유로든 전쟁은 수많은 사람들을 불행에 빠뜨립니다. 6.25 한국전쟁만 보아도 정말 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당했습니다. 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들뿐만 아니라 전쟁의 후유증으로 전쟁 과부와 전쟁 고아들이 속출했고, 국토는 황폐해졌습니다. 이러한 후유증은 한두 해 만에 회복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인류 역사에 왜 전쟁이 끊이지 않을까요? 그 원인은 종족적인 요인, 지정학적인 요인, 경제적인 요인 등 여러 다양한 요인이 있겠지만, 이 모든 요인들을 한 마디로 약축한다면 인간의 ‘이기적인 욕심’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면 인간의 선천적인 이기심은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일까요? 바로 원죄로 인한 죄성 때문에 이기심이 발동하는 것입니다. ‘약한 자는 강한 자에게 먹힌다’는 약육강식(弱肉强食)은 ‘정글의 법칙(the law of the jungle)’이라고 하는데, 그 이유인즉 이러한 현상은 주로 동물의 세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글에서 왕노릇하는 백수의 왕 사자조차도 배가 부르면 더 이상 약자들을 해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배가 불러도 배를 더 불리기 위해 약자를 제물로 삼는 일을 서슴지 않으니 어떤 면에서는 짐승보다 더 악랄한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 17:9에서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고 인간의 죄성을 예리하게 지적하신 바 있습니다.

톨스토이의 유명한 소설 『전쟁과 평화』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화의 반대말이 전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전쟁이 없다고 평화로운 상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현대에는 평화의 개념이 전쟁을 넘어 사람들을 괴롭히고 희생시키는 문제, 그리고 심지어 생태계를 교란시키는 모든 현상까지 포괄하는 넓은 의미로 점차 확대되어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평화의 참뜻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유대인들의 샬롬(shalom)의 개념을 이해하는 것이 도움이 되리라 봅니다. 샬롬은 매우 다양하고 포괄적인 의미를 지닌 단어입니다. 조금도 왜곡되거나 결핍이 없는 완벽한 상태가 샬롬입니다. 샬롬은 모든 차원의 관계에 있어서 막힘이 없는 극히 조화로운 상태를 의미합니다. 가장 가까운 이웃이라 할 수 있는 가족과의 화목으로부터 먼 이웃인 다른 종족들이나 국가들과도 갈등이 없는 상태, 자연과 상생하는 조화로운 상태, 자기 자신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내적인 갈등과 부정적인 감정으로부터 자유로운 마음의 평정,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과 막힘이 없는 화평한 소통, 이렇게 사중적(四重的, four-fold) 샬롬이 이루어질 때 완전한 샬롬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으며, 이것이 요즘 모든 사람들이 추구하는 진정한 ‘웰빙의 삶’인 것입니다.

샬롬이야말로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이요, 이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예수님은 이 땅에 ‘평화의 왕’으로 보내심을 받은 것입니다. 따라서 샬롬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바로 크리스천의 소명인 동시에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에 동참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샬롬을 구원의 또 다른 개념인 ‘화해(reconciliation)’와 사실상 같은 차원으로 보는 학자들도 없지 않습니다.

6.25전쟁이 발발한 지도 어언 74년이란 긴 세월이 흘렀건만 한반도는 허리가 반으로 잘린 채 아직도 남북한이 서로 반목하고 있으며, 더욱이 북핵문제로 인해 긴장의 수위가 날로 더해가고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깝고 답답하기 그지없는 분단조국의 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6.25전쟁을 가리켜 흔히들 ‘잊혀진 전쟁(forgotten war)’이라고 하지만, 그 가슴 아픈 역사를 잊어서는 안 되겠기에 지금 미국에서는 수도 워싱턴 D.C.에 이미 “자유는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Freedom is not free.)”라는 글귀로 유명한 한국전 참전기념 공원이 있는데도 이와는 별개로 ‘추모의 벽’이 세워졌습니다. ‘추모의 벽’에는 대리석 100개에다 6·25전쟁에서 전사한 미군 3만 6,595명과 한국군 지원부대(카투사) 7,174명 등 총 4만 3,000여 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평화를 당연한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너무 가까이 있으면 귀한 줄을 모릅니다. 우리는 태평성대를 구가하고 있기에 정작 평화의 소중함을 간과하기 쉽습니다. 우리는 평화로운 일상을 누릴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하나님께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한국에서 저와 함께 신앙생활을 했던 이주선 집사님(인터넷 경제신문 데일리 임팩트 논설위원, 기업&경제연구소장, 연세대 경영대 연구교수)이 저와 카톡으로 칼럼을 서로 나누는 사이인데, 지난 주간에 ‘나라의 안보와 평화를 수호하려면’이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했던 이야기가 공감이 되어 함께 나누어보려고 합니다.

“공짜인 신선한 공기와 맑은 생수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번영과 평화도 그리 여기는 것은 대단히 어리석다...사실 6.25 이후 지난 70년 이상의 평화와 우리가 누리는 번영과 자유는 이 전쟁을 계기로 만들어진 한미동맹을 근간으로 한 힘의 우위에 기반한 균형 덕분이다. 만일 한미동맹이 유지되지 않았다면, 북한 주사파 군사집단은 수십 번도 더 전쟁을 일으켰을 가능성이 크다. 아마 일본과 중국도 우리를 그대로 보고만 있지 않았을 수도 있다. 물론 그러면 경제발전과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것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인식이 많은 국민의 지지를 받고 있는지는 지극히 의심스럽다.”

우리 모두 “자유는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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