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유에스코리아뉴스

김재동 목사의 신앙칼럼

강남중 기자

김재동 원로목사 / 프로필


서울대학교 영문과, 전 청소년재단 이사장, 해외한인장로회(KPCA) 총회장 역임, 현 서울장로교회 원로목사, 전 워싱턴교역자회 회장, 전 워싱턴한인교회 협의회 회장, 목회학박사과정 수료, 워싱턴신학교(WTS) 기독교교육 박사과정 이수 중, 신학교 교수



예수님의 순종을 본받읍시다


이제 종려주일을 맞이합니다. 종려주일은 예수님이 고난을 받으시기 한 주 전,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군중들이 승리를 상징하는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흔들며 환영했다고 해서 붙여진 교회 절기입니다. 종려주일로부터 한 주간 고난주간이 이어지고, 이윽고 부활주일을 맞이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시지만 인간의 모습으로 성육신하셔서 온갖 고난을 당하시고 마침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빌립보서 2:6-8)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일체 관계 속에서, 성자 예수님은 비록 성부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셨지만, 성부 아버지께 온전히 순종하신 삶을 사셨습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한복음 10:30)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 고난의 잔을 마시지 않게 해 달라고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같이 되도록 아버지께 간곡히 기도하셨습니다. 성부 아버지께 대한 성자 예수님의 순종은 다음 말씀에서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요한복음 5:30)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자로서 마땅히 예수님의 순종을 본받아 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어릴 때부터 부모님께도 순종하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누가복음 2:51).

순종과 관련해 자주 인용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사울 왕의 불순종을 지적하고 꾸짖으면서 한 유명한 말, 즉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라는 말씀입니다.

(사무엘상 15:22-23)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邪神)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나님은 사울 왕에게 아말렉을 치고 모든 소유를 다 진멸하라고 하셨는데도, 사울 왕은 상태가 좋은 짐승들을 산 채로 끌고 왔습니다. 그러고는 이것들을 제물로 드리려고 그렇게 했노라고 거짓으로 둘러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의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실 턱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탐욕을 간파하시고 그를 폐위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 실한 짐승으로 제사를 드린답시고 피둥피둥한 짐승들을 그냥 산 채로 끌고 왔지만 정작 하나님은 수양의 기름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것을 더 좋아하신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었습니다.

우리는 가끔 하나님과 심리적인 숨바꼭질을 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희생이 따르고 손해가 될 것같이 생각될 때 불순종의 핑곗거리를 찾으려고 합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칠 때 그는 한두 가지 핑곗거리를 내세울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선 이삭은 대를 이어갈 ‘약속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 사람을 산 채로 제물로 바치는 인신제사(human sacrifice)는 여호와 신앙에 부합되지 않는 이방인들의 관행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이 취한 행동을 곰곰이 묵상해보면 그러한 구실을 제거하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한 흔적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모리아산 아래에 도착했을 때 사환들과 나귀를 거기에 남겨두고 이삭에게 장작을 지워 모리아산에 오릅니다. 왜 그랬을까요? 성경에 분명하게 언급되어 있진 않지만 짐작가는 게 있습니다. 외아들이 마지막 가는 길에 웬만하면 홀가분하게 나귀에 태워 편안하게 산을 오르도록 할 수도 있었을 텐데, 아브라함은 짐짓 아들에게 짐을 지워 달랑 아들 혼자만 데리고 산을 오릅니다. 짐작건대, 아들 대신 나귀를 바치려는 유혹이 있었을 수 있고, 종들은 아브라함이 아들을 묶고 죽이려고 할 때 늙어서 노망이 들었다고 완력으로 만류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만약 그랬더라면, 그는 하나님의 테스트에 불합격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가 이 순종의 테스트에 합격했을 때 이전보다 더 큰 축복을 확약(確約)하셨던 것입니다(창세기 22:16-18).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을 확인하고 온전히 순종하셨을 때 하나님은 반전의 축복을 주셨습니다.

(빌립보서 2:9-11)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 칼럼의 내용은 본 신문사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