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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동 목사의 신앙칼럼

강남중 기자

김재동 원로목사 / 프로필


서울대학교 영문과, 전 청소년재단 이사장, 해외한인장로회(KPCA) 총회장 역임, 현 서울장로교회 원로목사, 전 워싱턴교역자회 회장, 전 워싱턴한인교회 협의회 회장, 목회학박사과정 수료, 워싱턴신학교(WTS) 기독교교육 박사과정 이수 중, 신학교 교수



작은 것을 소중히 여기신 예수님



성경을 보면, 예수님은 유난히 작은 것을 소중히 여기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결코 소심하거나 쩨쩨하거나 쪼잔한 분이 아니시지만 우리의 생각 이상으로 사소한 것들을 챙기시는 모습을 자주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작은 것, 사소한 것을 챙기셨던 구체적인 사례들을 몇 가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선, “달란트의 비유”에서 주인(주님)은 다섯 달란트 받은 자가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왔을 때, 그리고 두 달란트 받은 자가 두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왔을 때 꼭 같은 말씀으로 칭찬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5:21, 23)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한 달란트 받은 자가 그 한 달란트를 땅에 묻어 두었다가 그대로 가지고 왔을 때 주님은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고 하시면서 매우 호되게 나무라셨습니다.

(마태복음 25:30)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다음으로, 누가복음 16에 나오는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에서도 주님은 심지어 ‘지극히’ 작은 것에 대한 소중함을 역설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6:10-11)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도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주님은 우리의 믿음과 관련해서도 작은 것의 소중함을 강조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7:6)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한국인들이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다녀올 때 겨자씨를 사 오거나 레미네이트(laminate)한 책갈피를 사 오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저도 겨자씨를 사 왔는데, 지금은 보관하지 못하고 있어 몹시 아쉬워할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 가장 작은 것을 말할 때 겨자씨에 비유를 하곤 했습니다.

예수님은 ‘소자(小子)’에 대해서도 남다른 관심을 보이셨습니다.

(마태복음 18:5-6)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마태복음 10:42)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우리는 사소한 것에 지나칠 정도로 간섭과 참견을 일삼는 남자를 흔히 ‘좁쌀영감’이라고 합니다. 대체로 부정적인 뉘앙스를 풍기는 말로서, 이런 지적을 받으면 기분이 별로입니다. 이스라엘 사회에서 가장 작은 걸 가리킬 때 겨자씨라고 하는 것처럼, 한국 사회에서는 가장 작은 걸 언급할 때 좁쌀에 비유하곤 합니다. 좁쌀을 활용한 사자성어로는 창해일속(滄海一粟)이 있습니다. ‘넓고 큰 바닷속의 좁쌀 한 알’이라는 뜻으로, 아주 많거나 넓은 것 가운데 들어있는 매우 하찮고 작은 것을 이르는 말입니다. 하지만 세상일은 작으면 작은 대로 쓰임새가 있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어떤 분이 지적하기를, 글쓰기에서는 쉼표가 바로 좁쌀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쉼표 하나 잘못 찍으면 수식하는 말이 바뀌어 전혀 다른 뜻이 될 수도 있고, 문장이나 노래에서 쉼표가 없으면 숨이 막혀 죽을 수도 있다고 해서 일리가 있는 말이구나 싶었습니다.

유교 문화에서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는 말은 매우 중요하게 다뤄지는 말입니다. 먼저 자기 자신을 수양하고 집안을 가지런하게 한 연후에 나라도 다스리고 천하도 평정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일반적으로 동양의 유교 문화권에서는 남자가 자기의 일신상의 일이나 가정사에 얽매이면 대범하지 못하고 사내대장부답지 못한 쫄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수신제가’라는 말을 곱씹어 볼 때, 그러한 생각은 유교 사상의 본질을 제대로 짚지 못한 탓에 갖게 되는 고정관념이거나 선입견 내지는 편견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키우는 못된 개[犬]가 두 마리 있는데, 하나는 선입견이고 다른 하나는 편견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는데, 한 번쯤 음미해 볼만한 말이라고 생각됩니다.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란 말도 같은 맥락을 지니고 있는 말입니다. “No sweat, no sweet.”라는 말이 있습니다. 열심히 땀 흘려 일해야 달콤한 휴식을 즐길 수 있고,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저는 말의 순서를 바꾸어 “No sweet, no sweat.”라고 해도 의미 있는 문장이 되겠구나, 하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Sweet home(가정의 평화)이 있어야 바깥에 나가 왕성한 근로 의욕을 가지고 땀 흘리며 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작은 것에 대한 감사를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감사하는 노인의 기도’(원제:은혜)라는 그림이 있습니다. 1918년 미국 미네소타주의 작은 탄광촌에서 사진관을 운영하는 에릭 엔스트롬이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백발이 성성하고 세상사에 몹시 지쳐 보이는, 야위고 남루한 옷을 입은 한 노인이 보잘것없는 신발 털개를 팔러왔습니다. 몹시 시장했던지 차 한 잔을 부탁하길래 차와 함께 빵과 수프를 조금 주었더니 테이블에 앉아 그 소박한 빵과 수프를 앞에 두고 진지하게 감사기도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감동을 받은 에릭은 그 모습을 흑백사진에 담았습니다. 그리고 후에 딸이 그 사진을 유화로 그려 오늘날 그 그림이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저도 이 성화를 볼 때마다 진한 감동을 느끼며 저절로 경건한 마음이 듭니다. 작은 일을 소중히 여기시는 주님은 사소한 축복에도 감사하는 우리의 신앙을 귀히 보시고 큰 복을 내려주시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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