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동 원로목사 / 프로필
서울대학교 영문과, 전 청소년재단 이사장, 해외한인장로회(KPCA) 총회장 역임, 현 서울장로교회 원로목사, 전 워싱턴교역자회 회장, 전 워싱턴한인교회 협의회 회장, 목회학박사과정 수료, 워싱턴신학교(WTS) 기독교교육 박사과정 이수 중, 신학교 교수
아프레 쓸라(apres cela, 그 다음에는)
필립 네리(Philip de Neri) 신부님은 16세기에 프랑스에서 성자로 불리던 분이었습니다. 어느 날 고학을 하던 한 법대생이 마지막 한 학기를 남겨 놓고 도저히 학비를 마련할 길이 없어 고민하던 끝에 필립 신부님을 찾아와 도움을 청했습니다. 마침 조금 전에 어떤 성도가 좋은 일에 써 달라면서 돈 봉투를 하나 놓고 갔습니다. 그래서 신부님은 “이건 분명히 자네를 위한 것일세” 하면서 돈을 세어보지도 않고 봉투째 건네주었습니다. 뜻밖의 도움을 받은 이 학생은
연신 감사하다고 하면서 환한 얼굴로 돌아 나오는데 신부님이 잠시 불러 세웁니다.
“한 가지 묻겠는데, 자네는 그 돈을 가지고 가서 뭘 하려나?”
“방금 말씀드린 대로 학비에 쓰겠습니다.”
“그 다음은?” “열심히 공부해서 졸업을 해야겠죠?”
“그 다음은?” “법관이 돼서 억울한 사람들을 돕겠습니다.”
“좋은 생각이구먼. 그래 주면 좋겠어. 그럼, 그 다음은?”
“돈 벌어서 결혼도 하고, 가족들도 부양해야죠.”
“그 다음은?” 심상치 않은 질문에 학생은 더 이상 대답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렸습니다.
그러자 신부님은 빙그레 웃으면서 “그 다음은 내가 말하지. 그 다음은 죽음이야. 그리고 그 다음은 심판대 앞에 서는 것이지.”
학생은 집으로 돌아왔지만 ‘apres cela?’라는 신부님의 질문이 계속 귓가에 맴돌았습니다. 결국 그 학생은 돈을 다시 신부님에게 돌려드리고 수도원으로 들어가서 수도사가 되어 귀한 일을 하면서 보람된 생애를 보내게 됩니다. 그리고 그가 죽고 난 후에 그의 묘비에는 그가 한평생 좌우명으로 삼았던 ‘Apres cela, apres cela, apres cela'를 새겨 놓았다고 합니다. 프랑스 파리에 있는 한 수도원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도 들고나며 인생의 의미를 되새기도록 하기 위해 큼지막한 돌에다 이 문구를 새겨놓았다고 합니다. ‘apres cela(아프레 쓸라)’는 프랑스어로 ‘그 다음에는(after this)’라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적은 죽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도 대적할 수 없는 상대이기 때문입니다. 고교 시절 윤리 교과서에 실렸던 내용으로 기억합니다만, 영국의 철학자 허버트 스펜서가 했다는 말이 유독 머리 속에 깊이 새겨져 있습니다.
“인간은 삶이 두려워 사회를 만들었고, 죽음이 두려워 종교를 만들었다.”
인생은 어떻게 보면 불확실성의 연속입니다. 그럼에도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는데, 바로 죽음입니다. 벤자민 플랭클린은 “인간에겐 피할 수 없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죽음이고 다른 하나는 세금이다.”라는 어록을 남긴 바 있습니다.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숙명적인 죽음에 빗대어 세금의 필연성을 역설한 것으로 이해됩니다. 세금은 국민의 의무이자 권리를 행사하는 수단이기 때문에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주권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피할 수 없는 숙명과도 같은 것이 곧 세금이라는 취지입니다. 성경은 "한 번 죽은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브리서 9:27)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평소에는 무척 의연한 척하다가도 막상 죽음이라는 문턱에 서면 대부분 두려움에 휩싸이게 됩니다. 평소에는 죽음이라는 것에 대하여 별로 생각하지 않고 지내다가도 타인들의 죽음을 대할 때면 한 번쯤 언젠가는 자신에게도 다가올 죽음에 대하여 생각해보게 됩니다. 마치 죽음이 없는 것처럼 또는 죽음이 자신과는 무관한 것처럼 살다가도 문득문득 죽음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는 게 인간입니다. 전도서 7:4은 “지혜로운 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느니라”고 정곡을 찌르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거의 모든 종교에는 사후에 대한 교리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피조물들과 달리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전도서 3:11). 칼뱅은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최초로 제시한 신학자입니다. 칼뱅은 인간의 마음에 선천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지각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인간이 신에 대한 인식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논쟁의 여지가 없는 보편적 진리라는 것입니다. 세계에 살고 있는 어떤 미개인이라 할지라도 신에 대한 관념을 갖고 있습니다. 이것을 칼뱅은 ‘종교의 씨앗(religionis semen, seed of religion)’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보편적인 종교심의 증거로 우상숭배를 제시하였습니다. 인간이 비록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다 할지라도 나무나 돌에게 예배하는 행태(totemism), 정령숭배(精靈崇拜, animism), 무당종교(Shamanism) 등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칼뱅은 건전한 판단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도 ‘신에 대한 감각(sensus divinitatis, sense of divinity)’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고 단언합니다. 인간이 아무리 부정해도 본성상 두려움을 쫓아낼 수 없다는 것이 바로 신의 존재를 확증한다는 주장입니다.
우리가 즐겨 인용하는 라틴어 문구 가운데 ‘memento mori’라는 말이 있습니다.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입니다. 얼핏 재수 없게 들릴 수도 있지만 극히 현실적인 교훈입니다. 이 말의 유래를 알고 나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들 것입니다. 고대 로마 시대에 원정에서 승리를 거두고 개선하는 장군이 시가행진을 할 때 노예를 시켜 행렬 뒤에서 큰 소리로 ‘메멘토 모리!’라고 외치게 했습니다. 오늘은 개선장군이지만 언젠가는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한 인간이니 마치 신이라도 된 양 우쭐대지 말고 겸손할 것을 교훈하기 위해 생겨난 풍습이라고 합니다. 우리도 ‘memeto mori’라는 말을 마음에 새기고, 수시로 자신에게 ‘apres cela(아프레 쓸라)’라는 질문을 던진다면 진정 지혜로운 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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