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동 원로목사 / 프로필
서울대학교 영문과, 전 청소년재단 이사장, 해외한인장로회(KPCA) 총회장 역임, 현 서울장로교회 원로목사, 전 워싱턴교역자회 회장, 전 워싱턴한인교회 협의회 회장, 목회학박사과정 수료, 워싱턴신학교(WTS) 기독교교육 박사과정 이수 중, 신학교 교수
하나님의 일식(日蝕)
약 한 달 전, 2024년 4월 8일에 북아메리카 대일식(Great North American Eclipse) 현상이라는 ‘세기의 우주 쇼’가 벌어졌습니다. 달이 지구와 태양 사이를 지나면서 태양을 완전히 가리는 개기일식을 이번에 못 보면 20년 후에나 볼 수 있다는 보도에 미국, 캐나다, 멕시코 및 기타 국가에 거주하는 약 6억 5,200만 명이 최소한 부분일식이라도 보기 위해 심지어 어떤 이들은 많은 경비를 들여가면서까지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으로 이동하는 바람에 경제적으로도 엄청난 효과를 보게 되었습니다. 미국의 어느 한인교회는 부활절 후 8일 만에 나타날 일식을 교회 사역에 적극 활용하기 위해 일식 관측이 가능하도록 필터가 장착된 특수 안경을 주문해서 안경에다가 교회 연락처와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니 어둠이 그 빛을 이기지 못하였다"(요한복음 1:5)라는 성경 구절 스티커를 붙여 부활주일에 나누어주었다고 합니다.
‘태양-달-지구’가 일직선상에 놓이게 되면 달이 태양을 가려서 지구에서는 태양을 볼 수 없게 됩니다. 마치 달이 태양을 집어삼키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일식(日蝕, Solar Eclipse)이라고 부릅니다. 특히 달이 태양을 완전히 가리는 개기일식 현상이 일어나면 순식간에 어둠이 온 천지를 뒤덮습니다. 과학이 발달하기 이전에는 이런 현상이 일어나면 천재지변이 일어날 불길한 징조라고 생각했습니다. 생명을 공급하는 태양이 사라졌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태양은 비록 보이지 않더라도 여전히 제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단지 잠시 달에 가려져 안 보일 뿐입니다.
신앙생활에서도 소위 ‘하나님의 일식’ 현상이 일어납니다. ‘하나님-문제-나’가 일직선상에 놓이게 되면, 문제가 하나님을 가려서 하나님을 볼 수 없게 만듭니다. 하나님이 안 계신 게 아니라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유대인 신학자인 마틴 부버(Martin Buber)는 인간이 고난을 당할 때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하나님의 일식’이라고 아주 적절하게 표현한 바 있습니다. 일식은 태양과 인간 사이에 일어난 사건이지 태양 그 자체에 일어나는 현상은 아닙니다. 우리의 죄로 인해 하나님이 안 계시는 것처럼 착각을 일으키지만,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으로서 바로 이 순간에도 우주 만물을 다스리고 계십니다.
우리는 고난을 당할 때 자칫 하나님의 일식 현상을 느끼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의 정황(Sitz im Leben)과 무관하게 하나님은 변함없이 늘 그 자리에 계시면서 섭리의 역사(役事)를 이어가고 계십니다. 어떤 사람은 이럴 때 “하나님이 숨어 계신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순간도 숨어 계신 적이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자신의 문제에만 골똘한 나머지 하나님이 보이지 않고 마치 숨어 계시는 것처럼 느낄 뿐입니다. 당면한 문제가 너무 커서 좌우를 분간 못 할 만큼 앞이 캄캄할 때 우리는 문제보다 월등히 더 위대하신 하나님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열두 해 동안 혈루병으로 고생하던 여인, 지척을 분간 못 하던 소경 바디메오, 귀신들린 딸을 가진 수로보니게 여인, 친구들에 의해 들것에 실려 주님 앞에 나온 중풍병자, 물질적으로 부요했지만 마음은 공허했던 삭게오, 모두 캄캄함 속에서 주님을 만남으로 인생의 일식을 극복하고 믿음의 사람들로 거듭나게 됩니다.
믿음으로 캄캄한 밤 속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본 어느 신앙인의 고백이 우리의 마음에 큰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1945년 독일 유태인 수용소 지하실 벽에 손톱으로 쓴 낙서입니다.
“나는 태양이 비치지 않을 때에도 태양이 있다는 것을 믿는다(I believe in the sun even when it's not shining) / 나는 사랑을 느낄 수 없을 때에도 사랑이 있다는 것을 믿는다(I believe in love even when I don't feel it) / 나는 하나님이 침묵하실 때에도 그분이 계신다는 것을 믿는다(I believe in God even when He is silent)”
구약성경에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얼굴을 숨기신다는 구절이 가끔 나옵니다. 하나님이 얼굴을 가리시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죄악에 대한 진노의 표시입니다. 신명기 32:20를 예로 들 수 있습니다.
“그가 말씀하시기를 내가 내 얼굴을 그들에게서 숨겨 그들의 종말이 어떠함을 보리니 그들은 심히 패역한 세대요 진실이 없는 자녀임이로다.”
그렇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일식’ 내지는 ‘하나님의 침묵’이지 결코 ‘하나님의 부재’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니체는 더 극단적으로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에서 ‘신의 죽음’을 언급했지만, 하나님께 죽음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때로 하나님의 침묵은 하나님의 언어와 지혜의 한 모습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창조 전에 침묵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때때로 하나님의 시선을 놓쳐버릴 때가 있습니다. 물 위로 담대하게 걸어가던 베드로가 주님의 시선을 놓쳤을 때 물에 빠져들어갔듯이, 우리도 신앙생활을 잘 하다가도 어려운 일을 당하면 너무나 쉽게 믿음의 줄을 놓아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른바 ‘신앙의 정전현상(blackout)’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친히 ‘내 마음에 합한 자“(a man after my own heart)라고 극구 칭찬했던 자였지만, 충직스러운 우리아 장군, 그것도 목숨을 걸고 전방에서 고군분투하는 부하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고 그 죄를 은닉하기 위해 평소의 그답지 않은 일련의 치사한 꼼수를 부리는 순간에는 분명 신앙의 정전이 일어난 게 틀림없습니다. 순간적으로 까막눈이 되고 만 것입니다.
주님은 마태복음 23장에서 위선을 일삼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해 “화 있을진 저!”를 연발하시면서 네 차례에 걸쳐 맹인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셨습니다. 종교를 빙자해 일신상의 유익을 도모하는 양아치 같은 위선자들을 향해 “너희들은 육신의 눈은 멀쩡하나 신앙적으로는 맹인이나 다름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특히 돈독이 올라 율법조차 왜곡하는 그들은 하나님께 대해 눈이 먼 자들이었고, 이 또한 어떤 의미에서는 신앙적인 일식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탐욕이 하나님을 향한 시선을 차단해버린 것입니다.
인간은 조금만 긴장의 고삐를 느슨하게 하면 너무나 쉽게 영적인 맹목이 되고 영적인 일식과 정전상태에 빠져들 소지가 다분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깨어서 기도하고 또 말씀을 묵상하는 중에 하나님과 원활하고 막힘없는 시선의 교류로 소통함으로써 영적으로 늘 건강한 상태를 유지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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