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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동 목사의 신앙칼럼

강남중 기자

김재동 원로목사 / 프로필


서울대학교 영문과, 전 청소년재단 이사장, 해외한인장로회(KPCA) 총회장 역임, 현 서울장로교회 원로목사, 전 워싱턴교역자회 회장, 전 워싱턴한인교회 협의회 회장, 목회학박사과정 수료, 워싱턴신학교(WTS) 기독교교육 박사과정 이수 중, 신학교 교수



일이냐 사람이냐



목회를 하다 보면 ‘일이냐 사람이냐’라는 문제에 봉착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일을 생각하면 사람이 울고, 사람을 생각하면 일이 우는 상황을 접할 때마다 ‘죽느냐 사느냐’만큼 심각하지는 않지만 참으로 고민이 되고 난감해지는 경험을 목회자라면 여러 번 경험했을 것입니다. 비단 목회뿐만 아니라 인간사 모든 영역에서 이러한 상황은 누구나 자주 접하게 됩니다. 가령 비즈니스를 경영하는 책임자일 경우, 성과를 더 앞세울 것인가 직원을 더 중요하게 배려해야 할 것인가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하는 상황을 하루에도 몇 차례 맞닥뜨릴 수 있습니다. 특히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마른 수건도 쥐어짜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서는 관리와 관계 사이에서 경영자의 고민은 더욱 깊어지기 마련입니다.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성과를 올리는 것이 경제학의 기본 원리라는 것은 누구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입니다. 도랑 치고 가재 잡고, 님도 보고 뽕도 딸 수 있는 양수겸장이면 오죽 좋으련만 인생살이가 그리 녹록지만은 않은 게 현실입니다.

이런 난감한 상황에 처할 때마다 습관적으로 제 머리를 스치는 한 사건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15장에 기록되어 있는 바울과 바나바의 다툼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의기투합한 가운데 한 팀을 이루어 함께 1차 전도여행을 성공리에 마친 후 2차 전도여행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서로 의견이 갈려 심하게 다투게 되고, 마침내 두 사람이 서로 갈라서게 되는 가슴 아픈 사건이 있었습니다. 다툼의 원인은 어찌 보면 사소한 문제였습니다. 바나바는 자기의 생질인 마가 요한을 이번에도 같이 데려가자고 했고, 바울은 절대로 안 된다고 반대했습니다. 왜냐하면, 마가 요한이 1차 전도여행에 수행원으로 동행했지만 생각보다 힘이 들었는지 중도하차했기 때문에 이렇게 사명감이 없는 자를 다시는 함께 데려갈 수 없다고 바울이 단호하게 반대했기 때문입니다. 도저히 접점을 찾지 못하게 되자 결국 두 사람은 따로 선교팀을 꾸리게 됩니다. 바울은 실라와 함께, 그리고 바나바는 마가 요한과 함께 2차 전도여행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혹자는 이 사건을 긍정적으로 보기도 합니다. 비록 피차 갈라서긴 했지만 두 팀이 각기 다른 지역으로 전도여행을 떠나게 되었으니 결과적으로는 잘 된 게 아니냐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이 주장은 그럴 수도 있고 안 그럴 수도 있는 하나의 가정일 뿐입니다. 서로 다른 의견이 잘 조율되어 원팀을 이루어 선교를 했더라면 더 큰 성과를 올릴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가정도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설령 두 팀으로 나눠지는 ‘덕분에’ 더 큰 성과를 올렸다고 가정하더라도 신앙적인 차원에서는 결코 칭찬할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이 사건으로 바울과 바나바가 영영 다시는 안 볼 처지가 되진 않았지만 두 사람의 관계에 금이 간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두 사람 다 믿음이 있는 사람이고 또 지향하는 목표가 같았기 때문에 다시 관계가 복원되긴 했지만 이전과 같이 서로 철석같이 신뢰하는 관계로까지 복원되긴 쉽지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마가 요한도 바울의 사역 말기에 다시 부름을 받기는 하지만 한 번 상한 감정의 골이 완전히 메워지기는 쉽지 않았으리라 짐작됩니다.



바나바로 말하자면, 그는 바울에게는 참으로 잊을 수 없는 은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처음 예수님을 만나고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있을 때, 예루살렘교회와 사도들에게 그를 소개하고 보증을 서준 사람이 바로 바나바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바울이 다소에 있을 때 일부러 멀리 찾아가서 안디옥 교회에서 함께 사역하자고 제안한 사람도 역시 바나바였습니다. 게다가 바나바는 인품이 출중해서 뭇사람에게 존경과 신임을 받는 자였으며, 구제하는 일에도 모범을 보인 자였습니다. 그의 원래 이름은 요셉이었으나 그의 선한 행실을 보고 사람들이 바나바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는데, 그 의미는 권위자(勸慰者, son of encouragement)입니다. 이러한 바나바의 여러 면모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바나바는 원만한 성격을 가진 자로서 인간관계를 중시하는 인물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반면에 사도 바울은 사명감이 투철했고 매사에 철두철미했으며, 그러다 보니 상대방의 흠결에 대해서는 너그러이 용납하지 못하는 성격의 소유자였던 것 같습니다. 이런 점에서 그는 사람 위주라기보다는 일 위주 타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비록 바울에 대한 대체적인 인상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여러 서신들을 보면 그는 의외로 인간관계를 소중하게 여겼고, 성도들을 매우 세심하게 챙길 정도로 가슴이 따뜻하고 마음이 부드러운 모습이 역력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한 마디로 사도 바울은 ‘냉철한 머리와 뜨거운 가슴’을 가진 자라고 해도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 사건에서는 그의 이러한 장점이 발휘되지 않았는지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마가 요한에게 단단히 다짐을 받고 데려가기로 했다면 참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내내 가시지 않습니다. 짐작건대 이 당시 아직 바울의 인격이 그 정도로 무르익지는 않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들이 신앙상 본질적인 문제로 이견이 있어서 다투고 갈라선 것은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마가 요한을 동행시키느냐 마느냐 하는 비교적 사소한 문제로 다투었기 때문에 다시 동역의 계기를 마련하기가 비교적 수월했을 것입니다. 부부가 갈라서는 가장 흔한 이유가 성격 차이라고들 합니다. 사실 ‘찰떡궁합’은 가물에 콩 날 정도로 드뭅니다. 안 맞는 성격을 서로 맞추어가면서 사는 게 삶의 지혜입니다.

‘사람이 선물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특히 교회에서는 성과가 좀 미흡하더라도 관계가 어그러지지 않도록 힘쓸 필요가 있습니다. 성과는 다시 올리면 되지만 한 번 깨어진 관계는 회복하기가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사람을 잃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영국의 기독교 사상가인 루이스(C.S. Lewis)는 사람들이 당하는 고통의 80%는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오는 것이라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틀린 게 아니라 다만 다를 뿐’이라는 사실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인간관계에서 한결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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