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동 원로목사 / 프로필
서울대학교 영문과, 전 청소년재단 이사장, 해외한인장로회(KPCA) 총회장 역임, 현 서울장로교회 원로목사, 전 워싱턴교역자회 회장, 전 워싱턴한인교회 협의회 회장, 목회학박사과정 수료, 워싱턴신학교(WTS) 기독교교육 박사과정 이수 중, 신학교 교수
성탄의 역설(paradox)
역설(逆說, paradox)이란 표면적으로는 모순되거나 부조리한 것 같지만 그 표면적인 진술 너머에 진실이 있음을 드러내는 것을 뜻합니다. 역설의 이러한 정의에 비추어 볼 때, 예수님의 성탄이야말로 역설 중의 역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고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그것도 냄새가 퀴퀴한 말구유에 탄생하셨다는 불편한 진실은 그 높이의 차이를 감히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역설적 사건임이 틀림없습니다. 삼위일체 교리에 의하면, 성자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시공(時空)을 초월하시고 인간의 역사를 뛰어넘으시는 하나님께서 친히 시공의 불편함을 감수하시고 자신을 최대한 축소시켜 인간의 역사 속으로 들어오신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인도의 요기들이 자신의 몸을 작은 상자 속에 억지로 구겨넣는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피차 만남이 불가능한 천상과 지상 그리고 영원과 시간이 한 인격체 안에서 만나 인류의 역사 속으로 투입된 사건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입니다. 그래서 성탄이야말로 역설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엄밀히 따져보면 예수님의 탄생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생애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역설입니다.
성경학자들이 ‘예수 그리스도 찬가’라고 이름을 붙인 빌립보서 2:5-11은 예수님의 역설적인 생애는 잘 요약해주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2:5-11)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제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이 구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비하(卑下·humiliation)’와 ‘승귀(昇貴·exaltation)’ 즉 그분의 낮아지심과 높아지심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주만물보다 크신 하나님이 인간의 사이즈로 작아지셨고, 인간이 당할 수 있는 가장 큰 고난을 당하셨지만 마침내 모든 사람이 그 앞에 무픞을 꿇는 반전의 삶을 사신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이 반전을 달리 표현하자면 역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이 구절을 대할 때마다 영어 알파벳 ‘V’자를 떠올리곤 합니다. 낮아지심과 높아지심을 함께 보여주는 형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예수님의 생애는 한 마디로 ‘V’ictory 즉 ‘승리’의 삶이라고 풀이해보고 싶습니다.
죽음과 부활, 멸망과 영생이라는 예수님의 드라마틱한 생애와 교훈이 보여주듯이 성경은 역설과 반전의 진리로 가득 차 있습니다. 약함이 오히려 강함이 되고, 낮아짐이 높아짐이 되며, 가난이 부요함이 되고, 쓰러짐이 일어남이 되는 역설과 반전은 성경 전체에 면면히 흐르고 있는 일관된 가르침입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바라보시며 자신이 한 알의 밀알로 죽는 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이 되고 자신에게도 영광이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이 부활의 영광의 서곡이며, 부활의 생명력으로 인해 영원히 멸망할 인류가 영생을 얻을 수 있음을 비유적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 역시 죽음과 수모를 부활과 영광으로 대비시킨 하나의 역설적 표현입니다. 이 말씀은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누가복음 14:11)는 역설적 교훈과 의미상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2:23-25)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예수님의 정신을 물려받은 사도 바울도 역설법으로 기독교 정신을 설파하기를 좋아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27-29)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도 하나님이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린도후서 8: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성탄의 계절은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역설을 음미하고 묵상하는 절기입니다. 우리가 성탄의 참 의미를 깨닫는다면 성탄절에 기쁨으로 성탄 장식을 하고 선물을 나누며 캐롤을 부르고 함께 식탁교제를 즐기는 것은 하등 나무랄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정작 성탄절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은 저 멀리 제쳐두고 세상적인 흥취와 세속적인 플렉스(flex)에 한껏 도취되어 흥청망청한다면 예수님이 결코 기뻐하지 않으시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성탄의 역설적 의미를 깨달을 때 예수님이 우리 마음 속에 성탄하실 것을 믿으며, 그때 비로소 ‘Merry Christmas!’가 될 수 있음을 마음 깊이 새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Number | Title | Dat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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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비하(humiliation)와 승귀(exalt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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