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유에스코리아뉴스

김재동 목사의 신앙칼럼

강남중 기자

김재동 원로목사 / 프로필


서울대학교 영문과, 전 청소년재단 이사장, 해외한인장로회(KPCA) 총회장 역임, 현 서울장로교회 원로목사, 전 워싱턴교역자회 회장, 전 워싱턴한인교회 협의회 회장, 목회학박사과정 수료, 워싱턴신학교(WTS) 기독교교육 박사과정 이수 중, 신학교 교수



세상은 평화 원하지만



CCM 중에 이런 노래가 있습니다.

1.세상은 평화 원하지만 전쟁의 소문 더 늘어간다

이 모든 인간 고통 두려움뿐 그 지겨움 끝없네

그러나 주 여기 계시듯

2.우리 주 사랑 안에 사네 주 우릴 하나로 회복했네

한 집에 사는 우리 형제자매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이듯 우린 하날세

3.형제들 하나 안에 살 때 얼마나 좋고도 즐거운가

달콤한 기름 부은 이슬처럼 우리 위에 내리네

생명 호흡 항상 새롭다

(후렴)

우리가 아들 믿을 때에 그의 영으로 하나 돼

우리가 아들 믿을 때에 그의 영으로 하나 돼

하날세(우리 모두 다) 하날세(우리 모두다)

하날세(우리 모두다) 하날세

올해 초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전쟁은 지금도 온 세계가 주시하고 있는 가운데 진행중입니다. 그러나 이 러-우 전쟁뿐만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촌 곳곳에서 우리가 미처 모르는 사이에 국가 간, 종족 간, 그리고 심지어 동족 간에 갈등과 분규와 전쟁이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온 인류가 그토록 평화를 염원하지만 전쟁의 소문은 날로 더 늘어만가고 있으니 정말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사실 전쟁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적으로 보아도 우리는 살인자 가인의 후예입니다.

그러면 왜 인류의 갈등과 분규와 다툼과 전쟁이 그치지 않을까요? 기독교의 인간관의 관점에서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기독교의 인간관은 성악설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원죄를 가지고 태어납니다. 인간이 지닌 이 죄성이 가장 도드라지게 드러나는 현상이 바로 이기심입니다. 바로 이 이기심으로 말미암아 온갖 문제가 야기되는 것입니다. 이기심 때문에 인간은 남보다는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데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부당하게 완력으로 남의 재산과 생명을 찬탈하는 데까지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의 극단적인 모습이 바로 전쟁입니다.



인간의 역사가 지속되는 한 인간의 이기심으로 인한 온갖 문제들을 완전히 해결할 방도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문제들을 줄이고 강도를 누그러뜨리는 것은 가능하리라 봅니다. 그것은 우리의 죄성을 점차 줄여나가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서는 이것을 성화(聖化)라고 합니다. 그런데 성화는 일순간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오랜 과정을 통해 조금씩 점진적으로 이루어집니다. 마치 흙탕물이 시간이 지나면서 부유물들이 조금씩 서서히 가라앉아 정화되는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흙탕물이 정화되는 것과 다른 점이 있다면, 성화의 과정은 반드시 상승곡선을 그리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한때 어느 정도 성화되었던 사람도 이런저런 일로 다시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가거나 후퇴하는 현상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만큼 성화의 과정은 결코 쉽지 않은 과정입니다. 그렇지만 자기 나름으로 목표를 정하고 말씀에 순종하면서 기도하며 꾸준히 노력한다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상당한 수준에 올라와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왕이면 목표를 높게 잡는 것이 좋습니다.

(에베소서 4:13-15)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mature)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성화된다는 것은 신앙적으로 성숙해진다는 뜻입니다. 사실 우리가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사는 동안에는 완전한 성화 즉 영화(榮化)의 경지에는 이룰 수 없다는 것이 장로교 목사로서 저의 신학적인 입장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상태(the whole measure of fullness of Christ)에 이르는 것’은 우리가 지향해야 할 목표이지만 이 땅에서는 도달할 수 없는 목표입니다. 비록 그렇더라도 우리는 그 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노력할 필요가 있으며, 그러한 노력 가운데 우리는 점진적으로 성화를 이루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곧 성탄절을 맞이합니다. 우리 조국이나 미국의 현실을 지켜보면서 너무나 갈등의 골이 깊어졌구나, 정말 한탄을 금할 수 없습니다. 지금 대한민국은 새 정부가 들어섰지만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습니다. 진영논리를 따라 ‘묻지마’ 지지가 판을 치고 있는 가운데 타협과 협치는 그저 단어로만 존재하는 한심스러운 세태가 되고 말았습니다. 국민 통합은 멀리 물 건너간 느낌입니다. 제가 살고 있는 미국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요즘에는 ‘두 개의 미국’이라는 말이 공공연한 화두가 되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한 가닥 희망을 거는 곳이 있다면 집단지성입니다. 한국이나 미국이나 때로는 막가파식으로 치닫는 것 같아 불안하지만 어느새 슬그머니 균형을 잡아가는 모습들을 보아왔기 때문입니다.

갈등의 골이 깊어질수록 평화의 왕으로 오신 주님을 대망하며, 우리 자신이 평화의 사도가 되어 깊게 패인 갈등의 골을 조금이나마 메꿔야겠다는 다짐이 있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봅니다.


***** 칼럼의 내용은 본 신문사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