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일 프로필
뉴욕 K 라디오 방송위원, 재외동포저널 이사, 하이유에스코리아 칼럼니스트
코메리칸 정치참여, 윤여태 의원이 남긴 유산들
이곳 이민의 땅에서 정치 참여는 우리 동포들의 제대로 된 삶을 영위 하기 위한 절체절명의 중요사안이다. 정치의 계절 선거의 계절이 다시 돌아오면서 뉴욕 뉴저지 한인 동포 사회의 정치 참여와 관련 커다란 족적을 남긴 윤여태 의원이 새삼 생각이난다. 그의 바람과 선도적 영향력은 그가 세상을 떠난 해 2000년 11월 선거 부터 큰 결실을 맺어 한인계 연방 하원 4명 당선, 각 지역의 주 상하의원 각 타운의 시장 시의원 배출이라는 결과로 또 아시안들의 권익을 지키자는 목소리가 전역에서 울려 퍼지고 있다. 이번 민주당 예선으로 뉴욕은 여성 주 하원 의원 배출을 눈앞에 두고 있다.
뉴욕일원 동포사회 성장의 견인차로 헌신해 온 윤여태 의원은 뉴저지 정치 일번지라는 저지시티 최초의 한인 재선 시의원으로 차기 저지시티 시장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무게있는 정치인으로서, 뉴욕 뉴저지 뿐 아니라 미 동부 한인 사회의 버팀목으로 자리매김해 왔던 거목이었다.
저지시티 시의회는 지난 4월 어느 토요일 오후에 시티홀에서 윤 의원의 2주기를 기리는 추모 행사를 개최 했다. 그만큼 그의 족적을 높이 평가하고 있으며 지역 주민 유권자들이 아직도 그를 그리워 하고 있다는 얘기다. 아다시피 저지시티은 뉴저지 내에서 가장 큰 도시의 하나이지만 한인 동포들이 많이 사는 곳은 아니다. 윤의원이 꾸준한 지역사회 봉사와 참여를 기반으로 뒤늦은 나이에 처음 선출직 시의원에 도전했을 때 지역구의 한인 유권자 수가 6명 밖에 없었다는 것은 유명한 얘기다.
윤 의원은 저지시티에 정착 하면서 부터 지역사회 참여에 적극 나섰던 인물이다. 지역 상인 번영회며 상공회의소에서 활동했고 장 저지시티 경제인협회 회장, 허드슨 경제개발 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하면서 주변 주민들은 무슨 일이 생기면 시장이나 시의원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윤여태, 마이클 윤을 찾아가야 일이 해결된다는 이야기 정설이 되기도 했다. 이를 바탕으로 임명 부시장에 지명돼 부시장일을 하기도했다. 이같은 다양한 사회 봉사, 지역 참여 경력을 바탕으로 주변의 강력한 권유와 추천에 의해 2013년 현실 정치에 뛰어들어 큰 성가와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1954년 대구에서 태어난 윤 의원은 1979년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미국으로 건너왔다. 1981년부터 저지시티 센트럴애비뉴에서 신문과 잡지, 잡화를 취급하는 스테이셔너리 ‘가든스테이트뉴스’를 운영하면서 지역사회에 뿌리를 내렸고 1993년 저지시티 개발위원회 위원으로 위촉돼 지역개발에 적극 참여하면서 신망을 얻기 시작했었다.
2013년 명예직이 아닌 직업 정치인으로 간주되는 광역시 저지시티 시의원 선거에 도전장을 낸 윤 의원은 결선투표 끝에 당선돼 화제를 모았다. 당시 지역구였던 하이츠 선거구는 한인 유권자가 단 6명에 불과했던 터라 그의 승리는 대 이변으로 받아들여졌다. 더욱이 그의 상대는 민주당 현역 주하원 의원이었다.
당선 이후 윤 의원은 괄목할 의정활동으로 성과를 크게 인정 받았고 2017년 재선에 도전, 여유있게 당선된 후 두 번째 임기를 이어가면서 유력한 시장 후보로 거론됐었다.
의정활동을 통해 윤의원은 시의 행정을 투명하게 견제해 허투루 쓰는 세금을 크게 절약했다는 찬사를 받았다. 개발업자들의 특혜로 여겨졌던 부동산세 감면 정책의 부당함을 알리고 투쟁한 결과, 2017년 부터 완전히 중단됐고 또 모국을 생각하는 한국계 의원으로서의 활약도 두드러졌다. 윤의원은 저지시티 리버티 주립공원에 미군 병사가 부상당한 한국 병사를 부축하는 형상을 본뜬 추모비가 있는 6.25전 참전 공원을 만드는 데 앞장 섰다. 추모비 안쪽의 한반도 지도 석판에는 독도를 새기고 선명하게 동해라고 표기했는데 이는 한반도 지도에 동해와 독도가 새겨진 유일한 참전비로 기록되고 있다.
그러던 중 지난 2020년 코비드가 막 초기 극성을 부리던 3월 16일 의심 증상을 보여 양성 판정을 받은 후 입원해 집중 치료실에서 산소호흡기 치료를 받아 오던중 4월6일 오후 12시53분 영면 했다. 그의 감염은 인간미와 친화력의 상징인 그가 후배 동료 의원을 위문 했다가 감염 됐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스티븐 플랍 저지시티 시장은 "훌륭한 동료이자 아버지, 할아버지였으며 저지시티 시민들을 위해 30년 이상 봉사했던 지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면서 저지시티 커뮤니티 모두가 진심으로 그를 기린다”고 했다.
한인 이민 1세로서 타민족 정치인보다 모범이 되는 의정 활동을 해 주민들에게 인정을 받는 것이 신념이었던 윤의원은 우리 한인 2세와 3세들이 정치에 도전할 때 좋은 선례가 될 수 있도록 선구자의 길을 닦기 위해 끝임 없이 노력했는 정치인이었다.
투표가 얼마나 중요한지, 정치참여, 특히 한인 2세들의 참여가 알마나 중요한지를 온몸으로 가르쳤다. 그는 이중언어 활용력을 매우 중시 했고 영어 공부에 솔선수범을 했다. 차세대 한인 지도자 양성을 위해서는 풀뿌리 민주주의에대한 이해가 중요하다"며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지역 정치 참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프로그램을 계속 만들어 한다"고 강조했다.
백여년 동안 아일랜드계가 독점했던 지역에서 한인 시의원 후보인 자신을 알리기 위해 화려한 나비넥타이를 매기 시작한 윤의원은 특유의 흰 머리와 환하게 웃는 얼굴, 정곡을 찌르는 멋진 연설로 지역 주민들의 인기를 끌었고, 뛰어난친화력과 정치력을 가진 정치인으로 화려하게 활약했다.
그가 유언처럼 남긴 말이 있다. 투표를 하는 것은 존재를 알리는 것이고, 그러면서 정치인, 정치를 작동시키려면 작더라도 직접 후원을 해야 한다는 얘기였다. 다시한번 고인의 혜안과 분투를 기리면서 고인의 호소가 동포사회에 계속 울림을 주기를 기대하면서 제현들의 정치참여를 권선한다.
뉴욕일원 동포사회 성장의 견인차로 헌신해 온 윤여태 의원은 뉴저지 정치 일번지라는 저지시티 최초의 한인 재선 시의원으로 차기 저지시티 시장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무게있는 정치인으로서, 뉴욕 뉴저지 뿐 아니라 미 동부 한인 사회의 버팀목으로 자리매김해 왔던 거목이었다.
저지시티 시의회는 지난 4월 어느 토요일 오후에 시티홀에서 윤 의원의 2주기를 기리는 추모 행사를 개최 했다. 그만큼 그의 족적을 높이 평가하고 있으며 지역 주민 유권자들이 아직도 그를 그리워 하고 있다는 얘기다. 아다시피 저지시티은 뉴저지 내에서 가장 큰 도시의 하나이지만 한인 동포들이 많이 사는 곳은 아니다. 윤의원이 꾸준한 지역사회 봉사와 참여를 기반으로 뒤늦은 나이에 처음 선출직 시의원에 도전했을 때 지역구의 한인 유권자 수가 6명 밖에 없었다는 것은 유명한 얘기다.
윤 의원은 저지시티에 정착 하면서 부터 지역사회 참여에 적극 나섰던 인물이다. 지역 상인 번영회며 상공회의소에서 활동했고 장 저지시티 경제인협회 회장, 허드슨 경제개발 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하면서 주변 주민들은 무슨 일이 생기면 시장이나 시의원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윤여태, 마이클 윤을 찾아가야 일이 해결된다는 이야기 정설이 되기도 했다. 이를 바탕으로 임명 부시장에 지명돼 부시장일을 하기도했다. 이같은 다양한 사회 봉사, 지역 참여 경력을 바탕으로 주변의 강력한 권유와 추천에 의해 2013년 현실 정치에 뛰어들어 큰 성가와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1954년 대구에서 태어난 윤 의원은 1979년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미국으로 건너왔다. 1981년부터 저지시티 센트럴애비뉴에서 신문과 잡지, 잡화를 취급하는 스테이셔너리 ‘가든스테이트뉴스’를 운영하면서 지역사회에 뿌리를 내렸고 1993년 저지시티 개발위원회 위원으로 위촉돼 지역개발에 적극 참여하면서 신망을 얻기 시작했었다.
2013년 명예직이 아닌 직업 정치인으로 간주되는 광역시 저지시티 시의원 선거에 도전장을 낸 윤 의원은 결선투표 끝에 당선돼 화제를 모았다. 당시 지역구였던 하이츠 선거구는 한인 유권자가 단 6명에 불과했던 터라 그의 승리는 대 이변으로 받아들여졌다. 더욱이 그의 상대는 민주당 현역 주하원 의원이었다.
당선 이후 윤 의원은 괄목할 의정활동으로 성과를 크게 인정 받았고 2017년 재선에 도전, 여유있게 당선된 후 두 번째 임기를 이어가면서 유력한 시장 후보로 거론됐었다.
의정활동을 통해 윤의원은 시의 행정을 투명하게 견제해 허투루 쓰는 세금을 크게 절약했다는 찬사를 받았다. 개발업자들의 특혜로 여겨졌던 부동산세 감면 정책의 부당함을 알리고 투쟁한 결과, 2017년 부터 완전히 중단됐고 또 모국을 생각하는 한국계 의원으로서의 활약도 두드러졌다. 윤의원은 저지시티 리버티 주립공원에 미군 병사가 부상당한 한국 병사를 부축하는 형상을 본뜬 추모비가 있는 6.25전 참전 공원을 만드는 데 앞장 섰다. 추모비 안쪽의 한반도 지도 석판에는 독도를 새기고 선명하게 동해라고 표기했는데 이는 한반도 지도에 동해와 독도가 새겨진 유일한 참전비로 기록되고 있다.
그러던 중 지난 2020년 코비드가 막 초기 극성을 부리던 3월 16일 의심 증상을 보여 양성 판정을 받은 후 입원해 집중 치료실에서 산소호흡기 치료를 받아 오던중 4월6일 오후 12시53분 영면 했다. 그의 감염은 인간미와 친화력의 상징인 그가 후배 동료 의원을 위문 했다가 감염 됐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스티븐 플랍 저지시티 시장은 "훌륭한 동료이자 아버지, 할아버지였으며 저지시티 시민들을 위해 30년 이상 봉사했던 지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면서 저지시티 커뮤니티 모두가 진심으로 그를 기린다”고 했다.
한인 이민 1세로서 타민족 정치인보다 모범이 되는 의정 활동을 해 주민들에게 인정을 받는 것이 신념이었던 윤의원은 우리 한인 2세와 3세들이 정치에 도전할 때 좋은 선례가 될 수 있도록 선구자의 길을 닦기 위해 끝임 없이 노력했는 정치인이었다.
투표가 얼마나 중요한지, 정치참여, 특히 한인 2세들의 참여가 알마나 중요한지를 온몸으로 가르쳤다. 그는 이중언어 활용력을 매우 중시 했고 영어 공부에 솔선수범을 했다. 차세대 한인 지도자 양성을 위해서는 풀뿌리 민주주의에대한 이해가 중요하다"며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지역 정치 참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프로그램을 계속 만들어 한다"고 강조했다.
백여년 동안 아일랜드계가 독점했던 지역에서 한인 시의원 후보인 자신을 알리기 위해 화려한 나비넥타이를 매기 시작한 윤의원은 특유의 흰 머리와 환하게 웃는 얼굴, 정곡을 찌르는 멋진 연설로 지역 주민들의 인기를 끌었고, 뛰어난친화력과 정치력을 가진 정치인으로 화려하게 활약했다.
그가 유언처럼 남긴 말이 있다. 투표를 하는 것은 존재를 알리는 것이고, 그러면서 정치인, 정치를 작동시키려면 작더라도 직접 후원을 해야 한다는 얘기였다. 다시한번 고인의 혜안과 분투를 기리면서 고인의 호소가 동포사회에 계속 울림을 주기를 기대하면서 제현들의 정치참여를 권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