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 DC는 미국의 수도이자 세계의 정치·행정 수도이다. 워싱턴 지역 동포사회 또한 이런 프레임에 벗어날 수 없어 한국 정치와 민감하게 서로 교차하고 있다. 이승만 대통령에서부터 대한민국 대통령들의 방미에 얽힌 일화를 중심으로 한미 간 풍습과 제도적 차이점을 매주 월,화 【리국 칼럼】으로 전해드린다. 필명인 리국 선생님은 재미 언론인으로 오랜기간 현장을 발로 뛰고 있는 기자이다.
대화나 통화 내용을 몰래 녹음해도 되는 걸까?: 미국의 통신비밀 금지법

소설가 공지영과 김부선이라는 영화배우가 통화 녹취록으로 실랑이를 벌여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김부선씨가 모 정치인과 스캔들 문제가 터져 나오며 어려움을 겪을 때 두 사람이 통화한 내용이 유출된 것이다.
그런데 만약 상대의 동의를 받지 않고 몰래 대화를 녹음했다면 미국에서는 어떻게 될까? 또 설령 녹음을 했더라도 공표할 수 있을까. 나아가 법정에서 통화 녹취한 내용이 증거물로 인정받을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답은 미국의 어느 주에 사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만약에 내가 사는 버지니아 주이라면 상대방과의 통화내용을 상대의 허락이 없어도 녹취할 수가 있다.
하지만 포토맥 강 건너 메릴랜드 주는 상대방 동의 없이 녹음을 하면 불법으로 처벌을 받는다. 반드시 상대가 사전에 동의해야만 녹음을 할 수가 있는 것이다.


메릴랜드에서 가게를 하던 H 씨가 있었다. 장사가 잘 안 되자 그는 많은 빚을 졌다.
채권자 중에는 A 씨란 사람도 있었다. A씨는 빌려준 돈을 돌려받기 위해 수시로 H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래도 돌려받기 쉽지 않자 화가 난 그는 욕설과 함께 “너 이 xx, 죽여 버리겠어!”라고 협박성 발언을 했다.
H씨는 그의 통화 내용을 모두 녹음했다. 죽여 버리겠다는 말은 살해 위협이었다. 한국에서는 화나면 누구나 지껄이는 욕설로 취급받지만 미국에서는 심각한 위협으로 간주된다.
녹음 내용을 들고 경찰서로 달려가기 전에 그는 아는 변호사로부터 조력을 받았다.
변호사는 “무조건 가지마세요”라며 그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당신이 경찰서로 가면 A씨가 체포되기 전에 먼저 당신이 불법 도청혐의로 체포됩니다. 그리고 중범죄로 기소가 돼 콩밥을 먹게 되요.”
메릴랜드 주에서는 대화든 전화통화이든 불법 녹취를 엄격하게 금하고 있다.
“대화의 모든 상대방이 동의하지 않은 상태에서 녹음을 하는 것은 중범죄에 해당되며 모든 상대방이 동의를 하더라도 범죄의 목적이라면 역시 중범죄로 다룬다.”
형사소송법은 불법 녹취자에 대해 최고 5년 형과 1만 달러의 벌금형에 처할 수 있다고 적시하고 있다.

메릴랜드처럼 미국에서는 캘리포니아, 펜실베이니아, 매사추세츠 등 12개 주가 상대방 동의 없는 녹취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를 ‘모든 해당자들의 동의법(All Parties consent Law)’이라고 한다.
만약에 내가 다른 두 사람의 대화나 통화를 녹취하려 한다면 두 사람 모두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모든 대화 참가자들의 동의를 얻어야 하는 것으로 엄격하게 규제하고 있다.
설령 부부싸움을 하더라도 배우자의 동의 없이 녹취를 하면 불법이 되는 것이다.
물론 예외 조항은 있다. 공공장소나 세미나 등에서 녹음을 하는 케이스다. 그 상황이 프라이버시 보호와 무관한 경우에는 아무 동의 없이 대화 녹취가 가능하다.
또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그 대화내용이 들릴 정도의 환경일 경우에도 녹음을 해도 무방하다.

그런데 버지니아 주와 워싱턴 DC는 이와 다르다. 일방 동의법(One party consent Law) 방식을 따른다.
내가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하거나 전화통화를 할 때 한 사람의 동의만 얻으면 된다. 그러니까 자기 자신의 동의(?)만 있으면 상대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언제든지 녹음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여러 명의 통화를 녹음할 때는 그 사람들의 거주지 법이 모두 다를 수 있기 때문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만약에 녹음이 합법화된 주에 사는 사람이 불법인 주에 사는 사람과 통화를 할 때는 쌍방 동의가 필요하다.
만약에 내가 아닌 다른 두 사람의 대화를 어느 한쪽의 동의도 없이 녹취했을 때는 불법으로 간주된다. 이 경우 최대 5년형과 2,500달러의 벌금형에 처해질 수 있다.

웨스트버지니아에 사는 한 여성은 부채 전문 컬렉션 회사로부터 빚을 갚지 않으면 집을 차압하겠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런데 그녀에게는 빚이 없었다. 그런데도 이 컬렉션 회사는 그녀의 말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고 전화로 욕설과 성적인 비하 발언을 일삼았다.
그녀는 컬렉션 회사와의 통화내용을 모두 녹음해 두었다가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웨스트버지니아 주는 상대 동의 없이도 녹음을 할 수 있는 주다.
재판 결과 컬렉션회사에 1천80만 달러의 손해배상을 하라는 판결이 내려졌다. 100억원이 넘는 천문학적 돈을 배상하라는 것이다.

스마트폰의 보급으로 상대 몰래 녹음을 손쉽게 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이 같은 대화 내용의 녹음은 약자가 강자에게 대응할 수 있는 순기능도 있지만 사생활 침해라는 비판도 만만치 않다.
요즘은 상대를 골탕 먹이기 위해, 상대의 약점을 잡기 위해 녹음을 하는 경우도 많아지고 있다. 세상은 점점 요지경이 되어 간다.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세상이 되어 가고 있다.
누군가와 대화를 하면서 녹음이 될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유령의 그림자처럼 불신의 세계를 뒤덮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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