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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국칼럼

강남중 기자

워싱턴 DC는 미국의 수도이자 세계의 정치·행정 수도이다. 워싱턴 지역 동포사회 또한 이런 프레임에 벗어날 수 없어 한국 정치와 민감하게 서로 교차하고 있다. 이승만 대통령에서부터 대한민국 대통령들의 방미에 얽힌 일화를 중심으로 한미 간 풍습과 제도적 차이점을 매주 월,화 【리국 칼럼】으로 전해드린다. 필명인 리국 선생님은 재미 언론인으로 오랜기간 현장을 발로 뛰고 있는 기자이다.



박정희, 최초로 시위대를 만나다: 대통령 방미에 얽힌 일화 2


백악관과 길 하나를 사이에 둔 영빈관인 블레어 하우스. 노란 색깔의 건물에 입구가 보인다.

#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미국 나들이

5.16이 일어난 그해 11월 11일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첫 방미 길에 오른다. 그는 먼저 일본 하네다 공항에 내려 이케다 수상과 회담을 하며 한일수교를 위한 길을 터놓았다.

박 의장 일행은 미 공군 특별와, 민항기 편으로 앵커리지, 시애틀, 시카고를 거쳐 11월13일 오후 4시에 워싱턴공항에 도착했다. 몇 차례나 중간 기착지를 들러 비행기를 갈아타야 하는 고난의 여정이었다.

1965년 육영수 여사와 러스크 국무장관의 부인의 모습. <사진=대통령기록관>

존슨 부통령, 러스크 국무장관이 환영 나왔는데 박 의장의 짧게 깎은 머리와 옅은 선글라스가 인상적이었다. 공항의 환영인파 중에는 젊은 박동선 씨도 나와 박 의장과 악수를 했다.

박 의장은 알링턴 국립묘지를 참배했으며 한미정상회담을 위해 백악관에 리무진이 도착하자 케네디 대통령과 재클린 여사가 마중 나와 악수를 하며 반겼다.

1962년 정일권 주미대사의 송별회. 왼쪽부터 박인덕, 최제창 박사, 황재경 목사, 서준택, 김현철 대사, 정일권 대사, 홍성철, 이진구.



박 의장은 이날 저녁 주미 한국대사관서 러스크 국무장관을 초청, 한식으로 만찬을 베풀기도 했다.

16일 낮에는 프레스센터에서 500명의 기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오찬 회견을 열고 “한국의 군사혁명은 불가피한 것이었으나 군정을 필요한 이상으로 연장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정희 의장은 이어 주미대사관서 동포 초청 연회를 베풀었는데 당시 대사는 정일권이었다.

박 의장 일행은 17일 뉴욕으로, 19일 샌프란시스코, 21일 하와이, 동경을 거쳐 서울로 돌아갔다. 비행기를 갈아타고 몇 군데나 중간기착하는 여정이라 방미 기간은 무려 15일이나 걸렸다. 요즘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을 느끼게 하는 미국 방문이었다.


박 대통령과 존슨 대통령이 의장대를 사열하고 있다. <사진= 대통령 기록관>

# 대통령 박정희의 워싱턴 방문

1965년 5월16일 박정희는 대통령 자격으로 미국을 공식 방문했다. 이번에는 존슨 대통령이 보내준 대통령 전용기 보잉 707에 몸을 실었다.

박 대통령은 알래스카에 기착한 후 16일 오후 5시 워싱턴 공군기지에 도착했으며 윌리엄스버그로 이동해 하룻밤을 묵었다.

버지니아의 남쪽에 있는 윌리엄스버그는 미국 초기의 식민지풍의 소도시다. 그런데 박 대통령이 왜 윌리엄스버그를 먼저 들렀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다음날 박 대통령 일행은 헬리콥터 편으로 백악관으로 향했다.



# 파격적인 카퍼레이드

한국군의 월남 파병 확대를 이끌어내야 하는 존슨 대통령은 파격적인 환영과 접대를 했다. 백악관 뜰에서 환영식을 한 후 17일 낮 12시경 존슨 대통령과 펜실베이니아 스트릿에서 함께 카퍼레이드를 한 후 영빈관인 블레어 하우스에 도착했다.

박 대통령이 백악관 앞에서 열린 존슨 대통령의 환영식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육영수 여사가 보인다. <사진=대통령 기록관>

‘와싱톤 지방 교포회 학생회’에서는 박 대통령 환영을 위해 퍼레이드에 참가해달라고 한인과 학생들에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또 여권 문제 등 정부에 대한 건의서를 박 대통령에 제출하기도 했다.

방미에는 이후락, 장기영, 박종규 등이 수행했다. 통역은 훗날 문화체육부 장관이 되는 조상호였다. 박 대통령은 4년 전 국가재건최고회의 방미 시절에는 긴장한 기색이 역렸했으나 이번에는 비교적 느긋한 표정이었다. 그만큼 한국이 키를 쥐고 있었다. 그리고 지난 4년간 국정 최고 책임자로서의 경험이 쌓인 것도 있었을 것이다.





한편 육영수 여사는 미 적십자사 시찰, 포토맥 강에서 미 재무장관 부인과 유람선을 타고 휴식을 즐겼다.

박 대통령은 프레스센터 오찬 기자회견에 이어 18일 오후 3시 알링턴 국립묘지를 참배하고 한국서 가져온 잣나무 기념식수, 케네디 대통령 묘소 참배, 그리고 링컨기념관 방문 등의 일정을 소화했다.

메이플라워 호텔

오후 6시30분부터는 메이플라워호텔에서 존슨 대통령을 위한 리셉션을 베풀었다. 이 리셉션에는 미 조야 인사 1천여 명이 참석했으며 헤어지면서 존슨 대통령은 육영수 여사의 손등에 키스를 하기도 했다.

이날 저녁 9시에는 교포 만찬회가 주미 한국대사관에서 열렸다. 이 자리에는 황재경 목사, 시인 모윤숙, 통일교의 박보희 씨 등이 참석했으며 박 대통령은 동포들을 위로, 격려했다.

환영행사에 참석한 육영수 여사와 존슨 대통령 부부가 인사를 나누고 있다.<사진=대통령기록관>

5월19일 아침, 박 대통령 일행은 2박3일 워싱턴 일정을 마치고 뉴욕에 도착해 브로드웨이에서 뉴욕 시청까지의 카 퍼레이드라는 파격적인 대접을 받았다.

박 대통령과 존슨 대통령이 개를 데리고 백악관 경내를 산책하며 대화를 나누고 있다. 왼쪽에 박종규의 모습도 보인다. <사진= 대통령 기록관>

# 3차 정상회담, 닉슨의 홀대

박 대통령은 3선 개헌을 앞둔 1969년 8월22-23일에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리차드 닉슨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앞서 닉슨이 대선에서 낙선해 방한했을 때 박 대통령의 홀대를 기억한 닉슨은 워싱턴이 아닌 미 서부로 회담장소를 정해 박 대통령을 서운하게 했다.

당시 워싱턴에서는 치과의사 로광욱 등 50여명이 3선 개헌 반대 구호를 외치며 대사관까지 행진하고 항의문을 제출했으며 백악관까지 데모를 계속했다. 이는 문민정부가 출범할 때까지 장장 20여년이나 지속된 워싱턴 민주화 운동의 신호탄이었다.

워싱턴에 온 박 대통령을 황재경 목사(왼쪽부터), 한표욱(전 주미 대리대사), 최제창 박사 등이 영접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