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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국칼럼

강남중 기자

워싱턴 DC는 미국의 수도이자 세계의 정치·행정 수도이다. 워싱턴 지역 동포사회 또한 이런 프레임에 벗어날 수 없어 한국 정치와 민감하게 서로 교차하고 있다. 이승만 대통령에서부터 대한민국 대통령들의 방미에 얽힌 일화를 중심으로 한미 간 풍습과 제도적 차이점을 매주 월,화 【리국 칼럼】으로 전해드린다. 필명인 리국 선생님은 재미 언론인으로 오랜기간 현장을 발로 뛰고 있는 기자이다.



전두환 경호원들과 워싱턴 도심 격투 : 대통령 방미에 얽힌 일화 3

대통령 방미에 얽힌 일화 3


전두환 대통령이 미국 공식방문 환송식에 참석하여 의장대를 사열하는 모습이다. <사진=국가기록원>

# 버스 33대 동원 공항 환영

12.12 쿠데타와 광주학살을 기반으로 집권한 전두환 대통령은 재임 중 두 차례 워싱턴을 방문했다. 그러나 피의 집권 때문에 그는 수많은 돈을 뿌려대며 동포들을 동원해야만 했다.

전두환, 이순자 대통령 부부가 공항에서 환영인사들과 악수를 하고 있다. <사진=국가기록원>

그가 도착하는 1981년 2월1일 메릴랜드의 앤드류스 공군기지로 가는 길에는 33대의 버스가 줄을 서는 진풍경을 연출했다. 동포 환영위원회(위원장 최제창)가 동원한 한인들이었다.

오후 4시 전두환이 도착하자 동원 인파는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들며 전두환을 반겼다. KBS 아나운서 출신인 이광재씨는 ‘만세!’를 선창해 두고두고 뒷말을 낳았다. 이날 ‘환영객’들에는 스카프가 선물로 들려졌다.

전두환 대통령이 백악관에 도착해 레이건 대통령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사진=국가기록원>

# 환영과 '광주학살 원흉'

전두환은 숙소인 블레어 하우스(영빈관) 앞에서도 통일교 신도 등 1천여 명의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그를 기다린 건 환영객들만이 아니었다. 바로 숙소 옆 라파엣 공원에는 2백여명의 한인들이 ‘광주 원흉’이라 쓴 플래카드를 들고 전두환을 격하게 ‘환영’했다.

이날 밤 워싱턴의 힐튼호텔에서 동포 리셉션이 열렸다. 이는 워싱턴에서 열린 첫 대규모 대통령 환영연이었다. 그러나 그 열기도 반(反) 전두환의 물결에 묻혔다.

전두환 동포 리셉션이 열린 워싱턴 힐튼호텔 전경.

호텔 앞에는 김응태, 박백선씨 등이 삭발을 하고 죄수옷을 입은 채 기다렸다. 고세곤, 박문규, 심기섭 등 50여명의 데모대들은 경비 경찰과 실랑이를 벌이며 ‘살인마’등 구호를 외쳐댔다. 호텔에 입장하는 동포들과 대사관 직원, 대통령을 수행한 조중훈 대한항공 사장을 비롯한 재벌들은 곤욕을 치렀다.


이순자 여사가 숙소인 영빈관(블레어 하우스)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국가기록원>


# 전경환을 전두환으로 착각해서

또 동생인 전경환을 전두환으로 착각하는 활극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당시 현장을 취재한 Y 기자는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전두환은 시위대를 피해 호텔 뒷문으로 들어갔다. 그걸 모르던 시위대의 눈에 전두환과 비슷하게 생긴 이가 탄 검은 세단이 도착하자 ‘저 XX 왔다!’며 누군가 외쳤다. 그러자 시위대의 조병웅이 바리케이드를 뛰어 넘어 세단으로 돌진했고 경호원 4-5명이 반사적으로 조를 막았다.

조와 경호원 사이에 순식간에 격투가 벌어졌는데 비록 머릿수에서는 밀렸지만 태권도가 5단인 조병웅의 기세도 대단했다. 모두가 붕붕 날았다. 활극은 그러나 미 경찰들이 달려와 금세 끝났다.

조병웅은 체포됐으나 경찰은 금방 풀어줬다. 당시 미국에서도 전두환의 악명을 익히 알고 있어 경찰들도 시위대를 동정하는 입장이었다.”

호텔 안에서 환영 리셉션이 끝나갈 무렵에도 작은 소동이 발생했다.

"전두환 대통령이 동포들과 악수를 하면서 퇴장하던 순간이었다. 전 대통령과 악수를 하려던 어떤 분이 양복 상의 주머니 안에 손을 넣었다. 그 순간에 경호원들이 그 남자를 덮쳐 제압했다.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남자는 주머니에 넣어둔 탄원서를 꺼내 대통령에게 건네주려든 것이었다."

대통령 앞에서 주머니에 손을 넣으니 총이나 칼이라도 꺼내는 줄 알고 경호원들이 달려든 것이었다. 이래저래 전두환의 환영 리셉션은 모양새가 구겨졌다.

1월28일부터 2월7일에 이뤄진 전두환의 방미는 동포사회를 분열시키는 역작용도 했다. 대사관이 주도해 만든 환영위에 부위원장으로 선임된 강철은 워싱턴한인회장이 불참을 선언하면서 환영위의 모양새가 구겨졌다. 이는 대통령 환영위 파동의 시발점이 됐다.



# 전두환 탄 차로 뛰어들고

전두환은 1985년 4월24일-29일 2차 방미를 했다. 앤드류스 공항에서는 송제경 환영위원장, 계은순 워싱턴한인회장, 마종인 평통 회장 등이 전두환을 맞았다.

미국을 방문한 전두환 대통령이 미국 레이건 대통령과의 백악관 정상회담 후, 레이건 대통령 주최 만찬에 참석한 모습이다.<사진=국가기록원>

이번에는 계은순 한인회장이 위원장을 맡겠다고 나섰으나 투표 끝에 송제경에 밀렸다. 한인회의 반정부 기류를 감지한 대사관(이동익 총영사)이 나서 ‘작업’을 벌인 결과였다.

전두환은 이번에는 헬리콥터로 워싱턴 모뉴먼트 광장으로 이동한 다음 숙소인 한국 대사관저까지는 차량으로 이동했다. 그 길에도 역시 환영과 반대 인파들이 뒤섞였다.

그 가운데 조창구씨가 대통령이 탄 차 앞으로 끼어들고 박백선은 도로에 뛰어들다 경찰에 연행돼 벌금 10달러를 물고 석방됐다.

26일 정상회담이 열리는 백악관 앞에서는 환영파와 반대파가 갈려 경쟁적으로 구호들을 외쳐댔다.

85년 방미시 동포 리셉션이 열린 메리엇 호텔.

그날 오후 14가의 내셔널 메리엇 호텔에서 열린 동포 리셉션도 정상적으로 진행되지 못했다. 만찬장에 들어가던 한인들에는 야유가 쏟아졌고 한 중년 여성이 청와대 경호원의 얼굴을 때리는 일도 발생했다.
전두환 시대의 불행한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