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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국칼럼

강남중 기자

워싱턴 DC는 미국의 수도이자 세계의 정치·행정 수도이다. 워싱턴 지역 동포사회 또한 이런 프레임에 벗어날 수 없어 한국 정치와 민감하게 서로 교차하고 있다. 이승만 대통령에서부터 대한민국 대통령들의 방미에 얽힌 일화를 중심으로 한미 간 풍습과 제도적 차이점을 매주 월,화 【리국 칼럼】으로 전해드린다. 필명인 리국 선생님은 재미 언론인으로 오랜기간 현장을 발로 뛰고 있는 기자이다.



청와대 경호원들과 워싱턴 건달들의 술집 난투극: 대통령 방미에 얽힌 일화 3 노태우

대통령 방미에 얽힌 일화 3 노태우


노태우 대통령이 미 국무장관 주최 오찬에 참석해 연설하고 있다 <사진=국가기록원>

# 반기문 총영사의 처신

노태우 대통령은 대선 3개월을 앞둔 1987년 9월 워싱턴을 찾아 레이건 대통령과 만났다.
민감한 시기에 감행한 일종의 ‘출마인사’였다.

그는 대통령에 취임하자 1989년 10월15일 조지 부시 대통령과의 회담을 위해 방미했다. 아버지 부시 시절이었다.
6월 민주화운동을 거치며 간만에 선거를 통해 집권한 ‘민선 대통령’을 맞는 분위기는 전두환 때와는 사뭇 달랐다. 환영위원장은 오석봉 워싱턴한인회장이 맡았다.

워싱턴 주재 총영사는 훗날 유엔 사무총장을 지낸 반기문이었다. 반 총영사는 동포사회에 마음으로 다가서려 노력했다. 그의 처신술이 돋보였다.

김옥숙 여사가 워싱턴의 한 재활원을 방문해 환자들을 격려하고 있다. <사진=국가기록원>

# 시위대를 막아라

대통령 방미에서 주미대사관이 신경을 바짝 쓰는 게 시위대를 ‘사전 예방’ 하는 임무다. 특히 총영사와 대사관 파견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 요원들의 능력은 시위를 여하히 잘 막아내는 것으로 평가가 나기도 했다.

1989년 외교문서에는 반기문 총영사가 노태우 대통령 방미를 위해 현지 반정부인사에게 시위 자제를 요청했던 내용이 잘 나타나 있다.

반 총영사는 노 전 대통령이 LA에서 한인들과 만나는 리셉션 행사를 5일 앞둔 10월 11일 워싱턴에서 최성일 박사를 만났다. 그는 “대통령 방미 중 반대 시위를 자제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대통령 환영 리셉션 초청장을 전달했다.

최성일 박사는 뉴욕 호바트윌리엄스미스대 정치학과 교수로, 미국의 대표적인 DJ 인사였다. 그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미국에 망명 중일 때 미 의회와 연결하고 대학 등 영어 강연을 돕는 역할을 했던 엘리트였다.
최 박사는 반 총영사에게 반대 시위를 하고 싶은 생각이 없으며 리셉션에는 참석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오석봉 회장은 “6.29 선언에 합법적으로 대선을 치르면서 분위기가 전과는 딴판이었다”며 “반정부 인사들을 만나 설득해 시위도 없었다”고 말했다.

백악관 환영행사가 열리고 있다. <사진=국가기록원>



# 앤드류스 공항의 환영단

노 대통령은 바로 워싱턴에 오지 않고 박정희 대통령처럼 버지니아 주 윌리엄스버그에 먼저 내려 하루를 묵었다. 왜 워싱턴으로 직행하지 않고 차로 3시간여 거리의 옛 ‘민속촌 마을’로 갔는지 그 이유는 알려지지 않는다. 다만 당시 노 대통령의 딸인 노소영씨가 인근의 윌리엄 &메리 대학에 재학 중이어서 이와 연관시켜 보는 시각이 있다.

방미단은 다음 날인 16일 비행기로 메릴랜드의 앤드류스 공군기지에 내렸다. 백악관과는 승용차로 30분 거리의 공항이다. 공항에 내린 노태우 대통령을 500여명의 한인들이 ‘만세’를 부르며 환영했다. 어떤 한인은 “묵은 역사 척결하고 새 역사 창조하자”는 팻말을 들고 흔들었다.

노 대통령 일행은 헬기로 백악관 앞의 워싱턴 모뉴먼트 광장으로 이동한 후 곧 백악관 영빈관인 블레어 하우스에 여장을 풀었다.

# 동포간담회 헤드 테이블에 누가 앉았나

그날 저녁 6시30분 워싱턴 시내에 있는 옴니 쇼람 호텔의 리젠시 볼룸에서 동포 리셉션이 열렸다. 1천여명의 참석자들은 대부분 워싱턴 한인들이었지만 뉴욕과 시카고 등 동부지역 한인들도 있었다.

노태우 대통령 동포 간담회가 열린 워싱턴의 옴니 쇼람 호텔

노 대통령 부부가 앉는 헤드 테이블에는 환영위원장인 오석봉 워싱턴한인회장과 미스아메리카대회에 출전해 2위로 입상한 차용희 양, 워싱턴한글학교협의회 이한봉 이사장, 신신자(신디 다우브) 연방 저작권특허재판소 의장, 진교륜 연방 원호처 차관보 등이 앉았다.

오석봉 회장의 환영사에 이어 노 대통령은 20분 동안 한국의 발전상을 소개했다. 그런데 대통령의 인사말 도중에 한 참석자가 불쑥 외쳤다. “대통령각하, 지금처럼 민주주의를 위해 소신껏 밀어나가 주세요!”
그 바람에 경호원들이 잠시 긴장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노태우 대통령 동포 리셉션이 열린 쇼람호텔의 리젠시 볼룸



# 나이트클럽의 무력충돌

그러나 진짜 해프닝은 대통령 방미 직전에 일어났다.

통상 대통령이 워싱턴을 방문하기 일주일 전쯤에 청와대 경호실의 선발대가 파견돼 사전 경호 준비작업을 하게 된다. 사고는 이들 선발대 경호원들이 한인이 운영하는 술집을 찾으면서 발생했다.

워싱턴에서 10분도 채 안 걸리는 글리브 로드(Glebe Road) 선상에 00정이라는 이름의 작은 술집이 있었다.

당시 워싱턴 한인사회에는 H라는 인물이 건달계의 우두머리 노릇을 하고 있었다. 물론 조직을 결성하거나 직업적으로 깡패 짓을 하고 다니는 사람은 아니었다.

공교롭게 H 패거리 6명이 그날 술집에서 한잔 하고 있었다. 그런데 처음보는 건장한 젊은 사람들을 술집에서 부닥치다보니 시비가 붙었다.

물론 청와대 경호원들은 자신들의 신분을 밝히지 않았다. 보안상 밝힐 수도 없었을 것이다. H패거리들이 "당신들 어디서 왔어?"라고 물으니 "한국에서 놀러왔다"고만 답했다.

청와대 경호원들과 워싱턴의 건달들이 술집에서 한판 붙었다.싸움은 길게 가지 않았다. 제 딴에는 힘 좀 쓴다고 거들먹거리던 건달들이 떡이 되도록 맞았다. 미국 경찰이 출동하고 난리가 났다.

대통령 방미를 앞두고 파견된 경호요원들이 한국 술집에서 동포들을 두들겨 팬 꼴이 된 것이다.
큰 법적, 외교적 파장이 생길 수 있는 케이스였으나 노 대통령의 방미를 앞두고 양국은 이를 무마하고 말았다.

노태우 대통령이 알링턴 국립묘지에서 헌화를 하고 있다. <사진=국가기록원>



# 알링턴국립묘지의 기념비

노태우 대통령은 17일에 알링턴국립묘지 무명용사탑에 헌화한 후 한국산 소나무를 기념 식수했다. 기념비에는 “여기 이 한국 소나무는 한국전 동안 자유를 지키기 위해 싸웠던 용감한 미국인들에게 증정하는 것이다. 소나무가 자라듯 평화와 자유를 애호하는 한미관계가 더욱 번영되기를 빈다.”는 내용이 씌어 있다.

이어 백악관에서 부시 대통령과 한미정상회담을 갖고 주미한국대사관저 2층 리셉션장에서 조지워싱턴대의 트라첸버그 총장으로부터 명예 법학박사학위를 수여받았다. 이 자리에는 부인 김옥숙 여사와 딸 소영씨, 아들 재헌 군 등 가족도 참석했다.

노태우 대통령과 부시 대통령 부부 <사진=국가기록원>

저녁에는 백악관 옆 17가에 있는 코코란미술관에서 박동진 주미대사 주최의 만찬에 참석했다. 이날 만찬에는 솔라즈 의원 등 상하원의원 27명, 체니 국방장관 등 행정부 각료, 언론계 인사 등 150여명이 부부 동반으로 참석했다.

18일에는 상하원 합동회의에서 ‘전진의 동반자’라는 제목으로 연설을 했으며 돌아오는 길에 로스앤젤레스에 들어 레이건 전 대통령과 동포들을 만나고 귀국했다.

노태우 대통령이 미국 의회에서 상하원의원들의 박수를 받으며 연설하는 모습이다. <사진=국가기록원>



# 2차 방미 소동

노태우 대통령은 이듬해인 1990년 6월에도 워싱턴을 방문했다. 당시 세계는 개방의 물결로 요동치고 있었다. 노 대통령은 워싱턴 방문 전에 샌프란시스코에 들러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했다. 북방외교였다.

노태우 대통령과 미국 부시 대통령이 한미 단독 정상회담을 하는 모습이다.<사진=국가기록원>
5일 워싱턴에 도착한 노태우 대통령은 6일 부시 미국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진 후 하와이를 거쳐 귀국했다.

그런데 노태우 대통령의 2차 방미를 앞두고 워싱턴한인사회는 다시 분란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었다. 엉뚱하게 대사관이 환영위원장 자리를 놓고 과욕을 부린 것이다.

이도영 워싱턴한인회장 대신 최광수 수도권메릴랜드한인회장이 환영위원장을 맡도록 추진하면서 대사관과 한인회와의 불화는 노골화됐다. 지역 한인회장에게 워싱턴 동포사회의 대표격을 맡겼으니 시끄러워진 건 불문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