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동 원로목사 프로필
서울대학교 영문과, 전 청소년재단 이사장, 해외한인장로회(KPCA) 총회장 역임, 현 서울장로교회 원로목사, 전 워싱턴교역자회 회장, 전 워싱턴한인교회 협의회 회장, 목회학박사과정 수료
생활예배

우리의 생활예배가 열납되지 않으면 우리 기도응답도 기대난망입니다.
예배는 ‘성전예배’만 있는 게 아니라 날마다 매순간마다 우리의 삶의 자리(Sitz im Leben)에서 우리 자신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예배도 있는데, 이러한 예배를 ‘생활예배’라고 불러도 좋을 것 같습니다.
(로마서 12:1-2)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구약시대에는 제사를 드릴 때 양이나 염소나 소와 같은 짐승을 죽여 제물로 드렸습니다. 그러나 그 짐승들은 사실상 제물을 드리는 자를 대신해서 희생을 당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 자신을 죽여서 하나님께 제물로 드릴 수는 없지만 우리의 삶 속에서 자신을 ‘살아있는 제물’(living sacrifice)로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영적 예배’(spiritual act of worship)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 주간 동안 살아있는 제물로서 하나님께 영적인 예배를 드리는 삶을 살다가 주일에 예배당에 나와 예배드릴 때 그 예배는 더욱 감격스러운 ‘성전예배’가 되며, 하나님께서 열납(悅納)하시는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전예배와 생활예배는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성전예배를 잘 드려야 생활예배도 잘 드릴 수 있고, 역으로 생활예배를 잘 드려야 성전예배도 잘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1장은 성전예배와 생활예배가 얼마나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생활은 엉망인 채 그저 절기를 따라 때우는 식으로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은 역겨울 만큼 싫어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1:11,13)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이사야 1장 전체를 읽어보면,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신앙적으로뿐만 아니라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완전히 바닥까지 내려갔음을 일일이 고발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란 한 군데도 없다고 했습니다. 특히 위정자들과 고위층의 타락상이 여과 없이 고스란히 까발려지고 있습니다.

(이사야 1:21,23) “신실하던 성읍이 어찌하여 창기가 되었는고. 정의가 거기에 충만하였고 공의가 그 가운데에 거하였었더니 이제는 살인자들뿐이로다. 네 고관들은 패역하여 도둑과 짝하며 다 뇌물을 사랑하며 예물을 구하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지 아니하며 과부의 송사를 수리하지 아니하는도다.”
이렇게 타락한 가운데서도 제사는 꼬박꼬박 챙겼고 재물도 부지런히 갖다 바쳤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제사를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예배는 빠지지 않고 드렸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예배를 거들떠보지도 않으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제사 행위나 제물 그 자체보다는 제사를 드리는 자에게 더 관심을 두십니다. 하나님은 아벨의 제물뿐만 아니라 아벨 자신도 함께 받으셨음을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의 제사와 제물을 거부하신 까닭은 그들의 생활이 올바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주님도 산상수훈에서 같은 취지의 교훈을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5:23-24)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우리의 생활예배가 열납되지 않으면 우리 기도응답도 기대난망입니다.
(이사야 1:15)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은 하나님께는 통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한 주간 엿새 동안 아무렇게나 살다가 주일 하루 잠시 교회에 나와 하나님과 빼꼼히 눈도장만 찍는 식의 예배를 하나님은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특히 요즘 코로나 사태로 인해 대면예배가 어려운 상황에서는 생활예배가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해졌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생활예배가 성전예배의 몫까지 어느 정도 감당해야 하는 상황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자칫 신앙적으로 해이해지기 쉬운 이 위기가 외려 생활예배를 강화하는 기회가 된다면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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