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동 원로목사 / 프로필
서울대학교 영문과, 전 청소년재단 이사장, 해외한인장로회(KPCA) 총회장 역임, 현 서울장로교회 원로목사, 전 워싱턴교역자회 회장, 전 워싱턴한인교회 협의회 회장, 목회학박사과정 수료, 워싱턴신학교(WTS) 기독교교육 박사과정 이수 중, PDSO, 강사
주님께 하듯 하라
주님께 하듯 하라

에베소서 5:22-6:9, 그리고 병행구절인 골로새서 3:18-4:1은 세 가지 인간관계에 대하여 교훈하고 있습니다. 부부관계, 부자관계 그리고 주종관계입니다. 이 세 가지 인간관계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상호윤리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 그리고 상전과 종의 관계에서 남편과 부모와 상전은 갑이고 아내와 자녀와 종은 을의 관계로 설정되는 경우를 자주 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성경구절을 자세히 읽어보면, 이 양자들 간의 관계는 일방윤리가 아닌 쌍방윤리 내지는 상호윤리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번 칼럼에서는 이 세 가지 인간관계 중에서 주종관계에 대해서, 그리고 주종관계 중에서도 종에 집중해서 상고해보려고 합니다. 주종관계는 요즘으로 말하자면 노사관계 즉 고용주와 피고용자 정도로 이해하면 되리라 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둘 사이에 지켜져야 할 윤리를 언급하면서 종들에게 ‘순종하되 주님을 경외하여 (with reverence for the Lord)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눈가림만 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코람 데오(Coram Deo)’의 정신으로 맡은 일을 진실한 마음으로 수행하라는 뜻입니다.
(골로새서 3:22)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이 말씀은 노예제도가 보편화되던 그 당시의 사회적 배경에서 주신 교훈입니다. 그 당시 로마에만 6천만 명이나 되는 노예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노예제도 하에서 종들은 주인의 소유였고, 사고팔 수 있는 물건과도 같은 존재였습니다. 종은 주인에게 절대복종 이외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습니다. 죽으라면 죽는 시늉이라도 해야 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많은 종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 난 후에 태도가 돌변한 종들이 생겨났습니다. 예수님 안에서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생각에 주인을 무시하고 불순종하는 사례가 빈번하게 일어났습니다. 한국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있었습니다. 조선시대에 복음이 들어와서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교회가 세워지면서 종들이 예수님을 먼저 믿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종은 장로이고 주인은 일반 성도인 경우가 생겨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한국교회에서도 매우 어색하고 곤란한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사도 바울은 이러한 태도에 대해서 그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온당하지 못한 일이라고 하면서, 그리스도인이기에 더욱 성실한 자세로 예수님을 섬기듯 상전을 섬기라고 교훈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바울이 노예제도를 정당한 제도로 용인했다고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그는 견고하게 굳어진 제도를 하루 아침에 당장 변혁시킬 수는 없으니 믿음에 의한 내적인 심령의 변화를 통해 서서히 사회 변혁을 이루어 내야 한다는 현실적인 인식을 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권면을 통해 우리는 사도 바울이, 비록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였을지는 모르나, 그리스도인의 직업관에 대한 그의 인식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소위 ‘직업 소명관’을 강조했습니다. 직업 소명론이란 직업을 통해서 하나님의 소명(Vocation, calling)을 이루는 것이므로 성실하고 즐거운 자세로 그 일에 임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말합니다. 우리는 종종 성속(聖俗)을 구분하는 이원론적인 사고에 빠지기 쉬우며, 스스로 경건하다고 자처하는 자들 가운데 그러한 경향이 더 뚜렷하게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깔뱅주의자들은 사회를 성과 속이라는 이원론에 따라 이분화하지 않으며, 사회와 그 사회의 제도도 절대적인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역사 속에 모든 질서를 설정하셨고, 이 모든 조직과 제도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이고 돕는 한낱 도구에 불과함을 인정하는 것이 개혁주의의 입장입니다. 따라서 개혁주의는 노동의 신성함을 새롭게 가르쳐주었고, 모든 세속적 직업도 신앙적인 의미를 지닌다고 계도했습니다. 중세에는 성직만이 하나님의 영광을 이루는 길이라고 인식했으나 루터는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음을 역설했습니다. 루터는 모든 직업을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행위로 보았으며, 따라서 윤리적으로 잘못이 없는 한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고 했습니다. 깔뱅도 모든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거룩한 삶은 세속으로부터 격리된 수도원적인 삶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불의와 맞서 싸우는 믿음의 선한 싸움이 진정한 거룩임을 강조했습니다. 네덜란드 신학자 아브라함 카이퍼도 예수님은 교회의 주인이실 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영역의 주인이심을 강조했습니다. 예수께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다”라고 설파하신 것은 우리가 세상 한가운데 있음을 전제로 한 말씀입니다. 물고기가 염도 3.5%의 바닷물 속에 살면서도 바닷물의 영향을 받지 않듯이, 우리도 혼탁한 세속의 삶 속에 살면서도 세상의 어둠을 밝히 드러내고 방부제와 조미료의 역할을 하는 염광(鹽光)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 주님의 교훈입니다. 교회당 안에서 드리는 예배가 물론 중요하지만, 교회당 바깥에서 산 제물(a living sacrifice)로 살아가는 생활 예배도 이에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그래서 어떤 목사님은 교회당 안에서의 예배에 이어지는 생활 속에서의 예배를 교회가 주일에 드리는 두 번째 예배에 빗대어 ‘2부 예배’라고 재미있게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저희가 미국교회를 빌려 예배를 드렸던 어느 교회에서는 교회 현관을 벗어나는 입구에다 “Now you are entering the mission field(이제 여러분은 선교의 장으로 들어갑니다)”라는 글귀를 써서 붙여놓았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개혁주의자들의 직업 소명관의 영향으로 현장 중심의 다양한 선교회들이 조직되어 활동을 펴고 있습니다. 크리스천 기업의 ‘직장선교회’를 위시해 익히 알려진 기독실업인회(CBMC), 그리고 이외에도 다양한 형태의 일터선교회(Workplace Ministry)들이 귀한 사역을 펼치고 있습니다.

일터선교의 모범 사례로 강단에서 자주 회자되는 실화가 있습니다. 중세 16세기에 살았던 로렌스 형제는 갈멜수도회 소속의 한 무명 수도사였고 주방 요리사였습니다. 그는 수도원 주방에서 산더미처럼 쌓인 온갖 궂은 일을 도맡아 하면서도 언제나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했습니다. 그는 마침내 성자로 일컬어지게 되었고, 자신의 ‘하나님 임재’의 체험을 바탕으로 쓴 『하나님의 임재 연습(The Practice of the Presence of God)』은 많은 사람에게 깊은 감명을 주고 있습니다. 이 책을 통해 그가 강조하는 것은 모든 일상사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하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일을 하나님을 위해서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든다면,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후라이팬의 작은 계란 하나라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뒤집는다. 그 일이 끝나면 나는 바닥에 엎드려 하나님을 경배한다. 설사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할지라도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방바닥에서 티끌 하나를 주워 올리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골로새서 3:23-24)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기업(inheritance)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에베소서 5:22-6:9, 그리고 병행구절인 골로새서 3:18-4:1은 세 가지 인간관계에 대하여 교훈하고 있습니다. 부부관계, 부자관계 그리고 주종관계입니다. 이 세 가지 인간관계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상호윤리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 그리고 상전과 종의 관계에서 남편과 부모와 상전은 갑이고 아내와 자녀와 종은 을의 관계로 설정되는 경우를 자주 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성경구절을 자세히 읽어보면, 이 양자들 간의 관계는 일방윤리가 아닌 쌍방윤리 내지는 상호윤리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번 칼럼에서는 이 세 가지 인간관계 중에서 주종관계에 대해서, 그리고 주종관계 중에서도 종에 집중해서 상고해보려고 합니다. 주종관계는 요즘으로 말하자면 노사관계 즉 고용주와 피고용자 정도로 이해하면 되리라 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둘 사이에 지켜져야 할 윤리를 언급하면서 종들에게 ‘순종하되 주님을 경외하여 (with reverence for the Lord)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눈가림만 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코람 데오(Coram Deo)’의 정신으로 맡은 일을 진실한 마음으로 수행하라는 뜻입니다.
(골로새서 3:22)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이 말씀은 노예제도가 보편화되던 그 당시의 사회적 배경에서 주신 교훈입니다. 그 당시 로마에만 6천만 명이나 되는 노예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노예제도 하에서 종들은 주인의 소유였고, 사고팔 수 있는 물건과도 같은 존재였습니다. 종은 주인에게 절대복종 이외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습니다. 죽으라면 죽는 시늉이라도 해야 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많은 종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 난 후에 태도가 돌변한 종들이 생겨났습니다. 예수님 안에서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생각에 주인을 무시하고 불순종하는 사례가 빈번하게 일어났습니다. 한국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있었습니다. 조선시대에 복음이 들어와서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교회가 세워지면서 종들이 예수님을 먼저 믿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종은 장로이고 주인은 일반 성도인 경우가 생겨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한국교회에서도 매우 어색하고 곤란한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사도 바울은 이러한 태도에 대해서 그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온당하지 못한 일이라고 하면서, 그리스도인이기에 더욱 성실한 자세로 예수님을 섬기듯 상전을 섬기라고 교훈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바울이 노예제도를 정당한 제도로 용인했다고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그는 견고하게 굳어진 제도를 하루 아침에 당장 변혁시킬 수는 없으니 믿음에 의한 내적인 심령의 변화를 통해 서서히 사회 변혁을 이루어 내야 한다는 현실적인 인식을 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권면을 통해 우리는 사도 바울이, 비록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였을지는 모르나, 그리스도인의 직업관에 대한 그의 인식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소위 ‘직업 소명관’을 강조했습니다. 직업 소명론이란 직업을 통해서 하나님의 소명(Vocation, calling)을 이루는 것이므로 성실하고 즐거운 자세로 그 일에 임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말합니다. 우리는 종종 성속(聖俗)을 구분하는 이원론적인 사고에 빠지기 쉬우며, 스스로 경건하다고 자처하는 자들 가운데 그러한 경향이 더 뚜렷하게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깔뱅주의자들은 사회를 성과 속이라는 이원론에 따라 이분화하지 않으며, 사회와 그 사회의 제도도 절대적인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역사 속에 모든 질서를 설정하셨고, 이 모든 조직과 제도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이고 돕는 한낱 도구에 불과함을 인정하는 것이 개혁주의의 입장입니다. 따라서 개혁주의는 노동의 신성함을 새롭게 가르쳐주었고, 모든 세속적 직업도 신앙적인 의미를 지닌다고 계도했습니다. 중세에는 성직만이 하나님의 영광을 이루는 길이라고 인식했으나 루터는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음을 역설했습니다. 루터는 모든 직업을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행위로 보았으며, 따라서 윤리적으로 잘못이 없는 한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고 했습니다. 깔뱅도 모든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거룩한 삶은 세속으로부터 격리된 수도원적인 삶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불의와 맞서 싸우는 믿음의 선한 싸움이 진정한 거룩임을 강조했습니다. 네덜란드 신학자 아브라함 카이퍼도 예수님은 교회의 주인이실 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영역의 주인이심을 강조했습니다. 예수께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다”라고 설파하신 것은 우리가 세상 한가운데 있음을 전제로 한 말씀입니다. 물고기가 염도 3.5%의 바닷물 속에 살면서도 바닷물의 영향을 받지 않듯이, 우리도 혼탁한 세속의 삶 속에 살면서도 세상의 어둠을 밝히 드러내고 방부제와 조미료의 역할을 하는 염광(鹽光)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 주님의 교훈입니다. 교회당 안에서 드리는 예배가 물론 중요하지만, 교회당 바깥에서 산 제물(a living sacrifice)로 살아가는 생활 예배도 이에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그래서 어떤 목사님은 교회당 안에서의 예배에 이어지는 생활 속에서의 예배를 교회가 주일에 드리는 두 번째 예배에 빗대어 ‘2부 예배’라고 재미있게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저희가 미국교회를 빌려 예배를 드렸던 어느 교회에서는 교회 현관을 벗어나는 입구에다 “Now you are entering the mission field(이제 여러분은 선교의 장으로 들어갑니다)”라는 글귀를 써서 붙여놓았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개혁주의자들의 직업 소명관의 영향으로 현장 중심의 다양한 선교회들이 조직되어 활동을 펴고 있습니다. 크리스천 기업의 ‘직장선교회’를 위시해 익히 알려진 기독실업인회(CBMC), 그리고 이외에도 다양한 형태의 일터선교회(Workplace Ministry)들이 귀한 사역을 펼치고 있습니다.

일터선교의 모범 사례로 강단에서 자주 회자되는 실화가 있습니다. 중세 16세기에 살았던 로렌스 형제는 갈멜수도회 소속의 한 무명 수도사였고 주방 요리사였습니다. 그는 수도원 주방에서 산더미처럼 쌓인 온갖 궂은 일을 도맡아 하면서도 언제나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했습니다. 그는 마침내 성자로 일컬어지게 되었고, 자신의 ‘하나님 임재’의 체험을 바탕으로 쓴 『하나님의 임재 연습(The Practice of the Presence of God)』은 많은 사람에게 깊은 감명을 주고 있습니다. 이 책을 통해 그가 강조하는 것은 모든 일상사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하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일을 하나님을 위해서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든다면,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후라이팬의 작은 계란 하나라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뒤집는다. 그 일이 끝나면 나는 바닥에 엎드려 하나님을 경배한다. 설사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할지라도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방바닥에서 티끌 하나를 주워 올리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골로새서 3:23-24)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기업(inheritance)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Number | Title | Date |
303 |
강림절(대림절)의 메시지
|
2023.12.08 |
302 |
이런 선교전략 어떤가요
|
2023.12.02 |
301 |
일용할 양식(Daily Bread)
|
2023.11.24 |
300 |
살아있음에 감사
|
2023.11.17 |
299 |
주님께 하듯 하라
|
2023.11.10 |
298 |
감사와 행복의 함수관계
|
2023.11.03 |
297 |
자유는 결코 당연한 게 아니다
|
2023.10.27 |
296 |
재물 얻을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
|
2023.10.19 |
295 |
두려움을 극복하는 비결
|
2023.10.14 |
294 |
염려를 극복하는 비결
|
2023.10.07 |
293 |
행복의 조건
|
2023.09.30 |
292 |
대체의 법칙
|
2023.09.23 |
291 |
아프레 쓸라(apres cela, 그 다음에는)
|
2023.09.15 |
290 |
의인인 동시에 죄인
|
2023.09.09 |
289 |
딤플 인생(Dimple Life)
|
2023.08.31 |
288 |
그리스도의 법
|
2023.08.26 |
287 |
그리스도인의 마그나카르타(Magna Carta)
|
2023.08.19 |
286 |
이중 전이(double transfer)
|
2023.08.11 |
285 |
우리는 무엇을 보아야 하는가
|
2023.08.05 |
284 |
강요된 은총
|
2023.07.29 |
283 |
꿈을 품는 자
|
2023.07.23 |
282 |
관계지수(NQ, Network Quotient)
|
2023.07.16 |
281 |
배려하는 마음
|
2023.07.08 |
280 |
철률(鐵律), 은률(銀律), 황금률(黃金律)
|
2023.07.02 |
279 |
역경지수(AQ, Adversity Quotient)
|
2023.06.25 |
278 |
소소한 일상에서 맛보는 행복
|
2023.06.16 |
277 |
‘덕분에’ vs ‘탓에’
|
2023.06.09 |
276 |
건천 신앙과 옹달샘 신앙
|
2023.06.03 |
275 |
나의 신앙간증 2제(題)
|
2023.05.26 |
274 |
환경이 어린이에게 미치는 영향
|
2023.05.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