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동 원로목사 / 프로필
서울대학교 영문과, 전 청소년재단 이사장, 해외한인장로회(KPCA) 총회장 역임, 현 서울장로교회 원로목사, 전 워싱턴교역자회 회장, 전 워싱턴한인교회 협의회 회장, 목회학박사과정 수료, 워싱턴신학교(WTS) 기독교교육 박사과정 이수 중, PDSO, 강사
의인인 동시에 죄인

파스칼은 세상에 오직 두 부류의 죄인이 있다고 했습니다. 한 부류는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죄인’ 즉 자신이 죄인이면서도 죄인인 줄 전혀 모르고 사는 죄인이요, 또 한 부류는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의인’ 즉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는 죄인으로서 ‘용서받은 죄인’을 말합니다. 독일의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크리스천을 가리켜 ‘의인인 동시에 죄인(simul justus et peccator)’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는데, 이 말은 ‘용서받은 죄인’을 가리켜 하는 말입니다. 모든 인간은 원죄로 인해 죄인으로 태어납니다. 그래서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로마서 3:10). 그러나 아무리 많은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공로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으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는 자는 죄용서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right)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요한복음 1:12).
이렇게 믿음으로 의롭다고 여김을 받았지만(칭의), 실존적인 삶 속에서는 우리 안에 남아있는 죄성(sinful nature)으로 말미암아 여전히 죄를 지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신분상으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실생활에서는 하나님의 자녀의 표준에 미치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왕의 아들로서 태어나면 왕자의 신분은 가지지만 행실은 온전히 왕자답지 못한 경우나 다름없습니다. ‘의인이자 죄인’ 또는 ‘용서받은 죄인’이라고 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원죄는 용서받았지만 일상에서 짓는 자범죄는 날마다 매순간 회개하고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목욕은 했지만 발에 묻는 먼지는 그때그때 씻어내야야 합니다. 주님께서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장면에서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요한복음 13:10).
이런 크리스천의 이중적인 정체성은 로버트 스티븐슨이 쓴 단편소설의 주인공인 ‘지킬 박사와 하이드’를 연상케 합니다. 이 소설은 한 사람 안에 두 개의 상반된 인격이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이러한 이중성은 크리스천의 실존적인 모습의 한 단면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듯합니다. 사도 바울도 자신 안에 두 개의 상반된 자아가 서로 갈등하고 있어 몹시 괴로워하고 있음을 가감 없이 매우 솔직하게 토로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7:19-24) “내가 원하는 바 선을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는 다른 한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바울은 자신의 진솔한 실존적 경험을 통해 그리스도인의 ‘두 자아의 갈등(conflict of two egos)’, 다시 말해서 루터가 지적했던 ‘그리스도인의 의인 됨과 죄인 됨’의 의미를 매우 실감 나게 묘사해주고 있습니다.
혹 어떤 이들은 자신이 성령충만한 가운데 신앙생활을 착실하게 할 때는 구원을 받은 것으로 생각하고 그렇지 못할 때는 구원을 받지 못한 것으로 오락가락하기도 합니다. 바울이 토로한 고민을 보면 마치 그가 그러한 사람으로 오해받을 여지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구원의 확신에 관한 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분입니다. 방금 인용한 말씀에 곧바로 이어지는 로마서 8장 서두에서 그는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8:1-2)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바로 앞에서 그는 절망적인 톤과 희망적인 톤이 뒤섞인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7:24-25)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인의 법을 섬기노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What a wretched man I am!).” 선을 행하려고 몸부림쳐보지만 내 안에 있는 죄성으로 인해 불가항력적으로 악을 행하게 되는 자신의 이중성 때문에 스스로 비참한 ‘구제불능자’로 여기고 ‘죽일 놈’이라고 자조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이 사망의 구렁텅이에서 구제해주실 예수님이 계시니 그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노라(Thanks be to God!)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로 아무런 공로 없어도 그분을 믿는 믿음 하나로 의롭다 여김을 받고 죄용서함 받았지만, 아직 완전히 성화되지 못했기 때문에 죄를 짓게 됩니다. 어떤 교파에서는 이 땅에서 우리가 완전성화를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상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립보서 2:12)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자칫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우리 인간의 노력으로 구원을 이룰 수 있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권면은 이미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에게 한 권면임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원어에 충실하게 번역하면, “continue to work out your salvation with fear and trembling”입니다. 마치 피트니스 센터에서 몸을 만들 듯이 꾸준히 성화의 과정을 거치며 ‘칭의(稱義)의 몸’을 근육질로 잘 가꾸라는 뜻입니다. 비록 아무런 흠결이 없는 상태인 영화(榮化)는 주님 앞에 갔을 때 이루어지지만 그때까지는 조금씩이라도 죄성에서 벗어나 주님을 닮아가는 삶을 살도록 노력하라는 권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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