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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동 목사의 신앙칼럼

강남중 기자

김재동 원로목사 / 프로필


서울대학교 영문과, 전 청소년재단 이사장, 해외한인장로회(KPCA) 총회장 역임, 현 서울장로교회 원로목사, 전 워싱턴교역자회 회장, 전 워싱턴한인교회 협의회 회장, 목회학박사과정 수료, 워싱턴신학교(WTS) 기독교교육 박사과정 이수 중, PDSO, 강사



그리스도의 법



지난 칼럼에서는 갈라디아서를 중심으로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하여 말씀드리면서, 이제 우리는 율법의 굴레에서 벗어나 맘껏 자유를 누려야 할 것을 역설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자칫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자유를 누린다고 해서 고삐 풀린 망아지마냥 마구 날뛰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자유에는 반드시 책임과 의무가 동반되기 때문입니다. 책임과 의무를 망각한 자유는 방종으로 치닫게 마련입니다. 갈라디아 5:1에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힘차게 외치자마자 곧바로 다음 말씀이 이어진다는 것에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13-15)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이 말씀은 그 앞에 나오는 말씀이 자칫 오해를 불러올 소지가 있기 때문에 그러한 오해의 소지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일종의 안전장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의 순수성을 강조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일말의 염려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의 머리 속에는 거짓 교사들의 이런 반문이 스쳐 갔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율법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단 말인가? 그럼 하나님께서 아예 율법 같은 건 주시지도 않았어야 옳지 않은가?” 생각이 이에 미치면 또 하나의 신학적 오류인 ‘무율법주의’ 내지는 ‘반율법주의’(antinomianism)에 빠질 위험성이 다분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러한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 복음으로 인해 맘껏 자유를 누리되 방종에 흘러서는 아니 된다는 교훈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은 율법의 정신마저 폐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율법의 정신은 한 단어로 요약하면 ‘사랑’입니다. 비록 자유를 위해 부르심을 받았으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로 삼아서는 안 되며 오히려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해야 즉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육체’는 죄성(sinful nature)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육체의 기회’란 죄성을 타고난 인간이 지향하는 생각과 행동 일체를 포괄하는 말입니다. ‘자유’와 ‘종노릇’은 마치 물과 기름처럼 서로 어울리지 않는 상반된 개념입니다. 궁합이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상반된 두 개념은 ‘사랑’ 안에서 서로 멋진 케미를 이루며 고차원의 도덕성으로 융합되는 것입니다.“ 여러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이 또한 기독교 교훈의 역설적인 면모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다“는 말씀은 율법의 정신이 무엇인지를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로마서 13:8-10)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사랑이야말로 ‘율법의 완성(the fulfillment of the law)’입니다. 모든 율법의 엑기스(essence)입니다. 십계명 중 인륜에 관련된 여섯 가지 계명은 ‘이웃 사랑’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부모 공경은 부모 사랑과 존중, 살인 금지는 이웃의 생명 존중, 간음 금지는 이웃의 순결 존중, 도적질 금지와 탐심 금지는 이웃의 유무형의 모든 소유를 존중할 것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존중은 사랑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구약의 모든 계명의 요체를 ‘새 계명’이라는 말로 깔끔하게 정리해주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3:34-35)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바울은 이웃의 짐을 져주는 한 가지 구체적인 실례를 언급하면서 이웃 사랑을 ‘그리스도의 법(the law of Christ)’이라고 명명했습니다.

(갈라디아서 6:1-2)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우리가 복음을 깨달음으로써 율법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지만 동시에 바로 그 순간 그리스도의 법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법은 강압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원하는 심정으로 준행하는 법이므로 방종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는 든든한 울타리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참된 자유를 즐기면서도 책임적인 삶에로 이끌어주는 은혜로운 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유와 방종은 둘 다 자유의 개념을 포함하고 있지만, 전자는 개인과 사회의 이익을 추구하는 반면 후자는 자유를 오남용하여 해를 끼치게 되므로 자유는 반드시 책임과 밸런스를 이루어야 진정한 자유가 된다는 사실을 한시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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