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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동 목사의 신앙칼럼

강남중 기자

김재동 원로목사 프로필


서울대학교 영문과, 전 청소년재단 이사장, 해외한인장로회(KPCA) 총회장 역임, 현 서울장로교회 원로목사, 전 워싱턴교역자회 회장, 전 워싱턴한인교회 협의회 회장, 목회학박사과정 수료



아버지 날(Father’s Day)의 단상(斷想)



오늘은 미국의 ‘아버지 날’(Father’s Day)입니다. 해마다 아버지 날을 맞이할 때마다 본능적으로 아버지의 정체성에 대하여 생각해보게 됩니다. 아버지는 누구인가, 아버지는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 나는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잘 하고 있는가, 등등 여러 가지 상념에 잠기게 됩니다.

인터넷을 통해 널리 알려진 “아버지는 누구인가?”라는 제법 긴 시가 있습니다. 듬성듬성 몇 구절만 인용해 봅니다.

아버지의 마음은 먹칠을 한 유리로 되어 있다.

그래서 잘 깨지기도 하지만 속은 잘 보이지 않는다.

아버지란 '내가 아버지 노릇을 제대로 하고 있나?

내가 정말 아버지다운가?' 하는 자책을 날마다 하는 사람이다.

아버지는 늘 자식들에게 그럴듯한 교훈을 하면서도,

실제 자신이 모범을 보이지 못하기 때문에, 이 점에 있어서는

미안하게 생각도 하고 남 모르는 콤플렉스도 가지고 있다.

아버지는 결코 무관심한 사람이 아니다.

아버지가 무관심한 것처럼 보이는 것은,

체면과 자존심과 미안함 같은 것이 어우러져서

그 마음을 쉽게 나타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어머니 앞에서는 기도도 안 하지만,

혼자 차를 운전하면서는 큰소리로 기도도 하고

주문을 외기도 하는 사람이다.

아버지! 뒷동산의 바위 같은 이름이다.

시골마을의 느티나무 같은 크나 큰 이름이다.




우리 주변에 어머니에 대한 찬사는 많이 있지만 아버지에 대한 찬사는 가뭄에 콩 나듯 어쩌다 들어볼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아버지의 사랑은 어머니의 사랑에 못 미치는 게 사실입니다. 그렇더라도 아버지들이 저평가되고 있는 현실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아버지들이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그들의 수고와 헌신은 어머니의 수고와 헌신에 비해 잘 드러나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게다가 아버지는 어머니에 비해 무심해보이기 쉽습니다. 속 마음을 잘 드러내지 않고 살갑게 대하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시사평론가는 현대를 가리켜 아버지가 없는 ‘파파 알리바이 시대’라고 명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아버지는 훈계만 일삼는 잔소리꾼으로, 그리고 “나 때는 말이야”를 반복하는 꼰대로 치부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특히 동양사회에서 아버지의 존재는 가정에서 모든 식구들 위에 군림하는 가부장적인 존재로 인식되기 십상입니다. 자기의 본분은 지키지 않으면서 가장이라는 지위만 내세우는 권위주의의 상징처럼 여겨지고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태도는 요즘 세상에서는 통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칫 권위와 권위주의를 착각할 때가 있습니다. 권위는 존중되어야 하지만 권위주의는 지양되어야 합니다. 그리스어로 권위(authority)를 ‘엑수시아’(ἐξουσία)라고 하는데, 이 말은 ἐξ(out of, ···로부터)와 ουσία(essence, 본질)의 합성어입니다. 즉 권위란 본질로부터 나오는 것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빈 깡통이 요란하고 빈 수레가 요란하듯이 실속이나 능력은 없으면서 허세만 부리는 것은 권위가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권위주의입니다. 권위는 지키고 존중해야 하지만 권위주의는 버려야 합니다. 목욕물은 버리고 아이는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목욕물과 함께 아이까지 버린다면 이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짓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미련스럽게도 권위주의를 버린답시고 권위마저 내팽개쳐버리는 잘못을 범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아버지가 존경을 받으려면 권위주의는 버리되 권위는 지켜야 합니다. 스스로 내세우거나 주장하는 권위는 참 권위가 아닙니다. 남들로부터 인정받고 존중받는 권위가 진정한 권위입니다. 그러한 권위는 저절로 주어지는 게 아닙니다. 사랑과 희생과 헌신과 솔선수범을 통해 주어집니다. 권위와 권위주의의 관계와 흡사한 것으로 율법과 율법주의가 있습니다. 율법 자체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니 선하고 신성한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주의는 타기(唾棄)해야 할 대상입니다. 주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위선적인 태도를 신랄하게 나무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치는 율법교사요 율법을 일점일획도 어김없이 철저하게 준수한다고 자부하는 자들이면서도 정작 율법의 알맹이는 버리고 빈 껍데기만 문자적으로 지키려 했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그 껍데기마저도 제대로 지키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백성들에게 모범을 보이기는커녕 오히려 지탄의 대상이 되어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23:2-4)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들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들은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느니라.”

요즘 한국 정치계에서 자주 언급되는 내로남불은 일차적으로는 소위 꼰대 정치인들의 이중잣대의 태도를 의미하지만, 다른 각도에서 보면 말과 행동이 다른 위선의 전형적인 행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행태에 신물이 난 젊은이들이 30대 야당 대표를 뽑는 데 일조했으며, 앞으로 대선에서도 지렛대 역할을 하겠다고 잔뜩 벼르고 있습니다. 아버지 날을 맞아 모든 아버지들도 꼰대 이미지에서 벗어나 참 권위를 보여줄 수 있는 모범적인 가장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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