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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동 목사의 신앙칼럼

강남중 기자

김재동 원로목사 프로필


서울대학교 영문과, 전 청소년재단 이사장, 해외한인장로회(KPCA) 총회장 역임, 현 서울장로교회 원로목사, 전 워싱턴교역자회 회장, 전 워싱턴한인교회 협의회 회장, 목회학박사과정 수료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어느 신학교 학년말 고사에서 공부는 하지 않고 철야기도만 하는 어느 학생에게 교수님은 기도만 하지 말고 제발 시험준비 좀 하라고 충고했지만 막무가내였습니다. 그 학생은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는 주님의 말씀만 철석같이 믿고 기도만 했습니다. 드디어 시험 날이 왔습니다. 그런데 막상 시험지를 받아보니 아는 문제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다가 달랑 한 문장만 써놓고 유유히 교실을 빠져나갔습니다.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채점을 하려고 답안지를 받아본 교수님은 실소를 금할 수 없었습니다. 한편으로는 “그러면 그렇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고민스럽기도 했습니다. 그 학생이 쓴 답은 교수님이 요구하는 정답은 아니었지만 말 자체로만 보면 틀린 말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냥 0점 처리하기에는 뭔가 마음 한켠에 켕기는 게 있어 잠시 눈을 감고 묵상을 하는 중에 한 가지 묘안이 떠올랐습니다. 기지를 발휘해 장군멍군식으로 답하기로 했습니다.

“하나님은 다 아시니 만점, 학생은 다 모르니 빵점.”

신학생들의 경험담 중에는 이렇게 기도만 하다가 낭패를 맛본 후 “성령님도 시험에는 쩔쩔매시더라.”고 우스갯소리를 한 일도 있고, “어려운 문제의 답은 참고서에 다 있습니다.”라고 답안지를 작성해 교수님을 실소케 했다는 재미난 이야기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품 가운데 사랑이나 자비와 같이 인간이 공유할 수 있는 성품들도 있지만, 하나님만이 지니실 수 있는 고유한 성품도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전지전능(全知全能)입니다.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다 하실 수 있으며, 무엇이든지 다 알고 계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무소부재(無所不在)도 하나님의 고유한 성품 중 하나입니다. 하나님은 안 계신 곳이 없이 항상 어디에나 계신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교회 생활의 연륜이 있는 중직자들 중에는 강대상에서 대표로 기도를 인도할 때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신 하나님 아버지시여”라는 상투적인 어투로 기도의 문을 여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전지하심을 가장 잘 보여주는 성경 말씀은 아마도 시편 139편이 아닐까 싶습니다.

(시편 139:1-4)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한 마디로, 하나님은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두루 세밀하게 살피시며, 나의 모든 언행심사(言行心事)를 그 동기까지도 꿰뚫어 보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두렵고 또 한편으로는 믿음직스러운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잠언 1:7은 “여호와를 경외(敬畏)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말씀하고 있고, 잠언 9:10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식과 지혜와 명철의 근본은 여호와를 알고 경외하는 것입니다. ‘경외’를 영어성경에서는 대부분 ‘fear’로 번역하고 있는데, 엄밀히 말하면 정확한 번역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히브리어로는 ‘야레’(יָרֵא)인데, 이 단어는 단순히 두려움이라는 의미보다 더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영어로는 이 단어의 포괄적인 의미를 한 단어로 옮길 수 있는 마땅한 단어가 없어서 편의상 fear로 번역하곤 합니다. 그러다 보니 자칫 하나님은 우리를 벌주시는 무서운 폭군으로 오해를 받으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오해를 불식하기 위해 가능한 한 원어의 의미를 충실히 살려 ‘fear with reverence’(공경하는 마음으로 두려워하다) 또는 ‘fear with awe’(경외하는 마음으로 두려워하다)라고 풀어서 번역한 성경들도 볼 수 있습니다. 또 fear 대신 revere(숭배하다, 공경하다)라는 단어를 사용한 예도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경외하다’로 번역한 한국어 성경은 아주 잘 된 번역이라고 생각됩니다.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은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이사야 6:5), 그리고 베드로가 예수님의 기적의 현장에서 느꼈던 감정(누가복음 5:8), 즉 모골이 송연해지는 바로 그러한 감정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기에 우리의 죄를 간과(看過)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지 않도록 늘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숨길 수 있는 죄는 없습니다. ‘코람 데오’(Coram Deo, 하나님 앞에서)를 인생의 좌우명으로 삼는 크리스천이 많은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성경이 여호와 경외와 계명 준수를 한 묶음으로 연결해 말씀하고 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 인간은 죄성으로 인한 연약함으로 말미암아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죄를 짓습니다. 그럴 경우에도 진심으로 죄와 허물을 회개하면 사랑의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고 다시는 기억하지 않으실 것이라 약속해주셨으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우리가 전지하신 하나님을 믿을 때 경외하는 마음만 생기는 게 아니라 그 분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할 수 있는 믿음도 생기게 됩니다. 우리의 머리카락까지도 헤아리실 정도로 세심하게 우리 인생의 대소사를 일일이 보살펴주시는 하나님, 실수도 실패도 없으신 하나님을 인생의 안내자와 인도자로 모실 때 마음이 든든해지고 참으로 안심이 되지 않습니까!

(신명기 6:24)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이 모든 규례를 지키라 명하셨으니 이는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항상 복을 누리게 하기 위하심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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