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유에스코리아뉴스

김재동 목사의 신앙칼럼

강남중 기자

김재동 원로목사 프로필


서울대학교 영문과, 전 청소년재단 이사장, 해외한인장로회(KPCA) 총회장 역임, 현 서울장로교회 원로목사, 전 워싱턴교역자회 회장, 전 워싱턴한인교회 협의회 회장, 목회학박사과정 수료



기독교 신앙에서 본 ‘평등’과 ‘공평(공정)’



지난 칼럼 ‘공정한 잣대’에서 평등(equality)과 공평(공정, fairness)이라는 주제를 다루면서 제 머리를 스친 것은 “기독교 신앙에서 평등과 공평(공정)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더하여 공평과 정의를 함께 고려하는 ‘형평’(equity)이라는 개념에 대한 기독교적 관점도 한번 관심을 가져볼 주제라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니겠지만 비전문가의 입장에서 대략 원론적인 개념들만 상고해보려고 합니다.

우선 성경에 딱히 명시된 구절은 없지만 모든 인류는 태어날 때부터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갖는다는 ‘천부인권’ 내지는 자연권(natural rights) 사상이 그 저변에 흐르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익히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미국의 독립선언서에도 명시되어 있는 절대 평등권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특히 구원과 관련해 평등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즉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개인적인 구세주로 영접하는 자는 아무런 차별 없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기독교 특유의 영적 진리입니다.

(갈라디아서 3:26-29)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니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이면 인종, 국적, 신분, 성별, 혈통에 상관없이 다 그리스도의 소유가 되며,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하나님의 나라와 복락을 상속받을 자격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구원은 쉽게 말해서 ‘영원히 지옥 형벌을 받아야 할 운명에 처한 죄인인 인간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영원토록 천국복락을 누릴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으로 180도 역전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골백번 죽었다 깨어나도 인간 스스로의 노력으로는 도저히 이룰 수 없는 일이므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신 나머지 죄 없는 독생자를 대신 희생시키심으로 인간에게 부여하신 무상(無償)의 은혜요 선물입니다. 만일 구원이 인간 스스로 이룰 수 있는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요구하셨을 것입니다. 은혜란 ‘무자격자에게 베푸는 무상의 호의’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2:8-9) “너희가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구원은 인간의 ‘행위’(works) 즉 자격이나 공로나 업적이나 선행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거저 베푸시는 하사품입니다. 이것은 되갚지 않아도 되는 일종의 그랜트(grant)인 셈입니다. 만일 인간의 행위를 기준으로 구원을 베푸신다면 그 기준을 어떻게 설정할 수 있을까요? 만일 그 기준을 설정할 수 있다면 명확하게 제시하셨을 것입니다. 이것 한 가지만 깊이 묵상해보아도 구원이 인간의 행위에 의한 것일 수 없다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구원의 유일무이한 조건으로 일관성 있게 기록해놓고 있습니다.

그런데 구원과는 달리 ‘상급’에 대해서는 평등의 원칙 대신 공평(공정)의 원칙이 적용됩니다. 쉽게 말해서, 일한 만큼 보상을 해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보라, 내가 속히 오리리 내가 줄 상(reward)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주리라”(요한계시록 22:12)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이 가장 화가 나는 경우는 부당한 대우를 받을 때입니다. 그럴 때 사람들은 격앙된 목소리로 “It’s not fair!”라고 외치게 됩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just) 분입니다. 구원은 인간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과제이기에 누구에게나 차별 없이 베푸시지만, 보상은 인간 스스로 노력해서 얻는 게 마땅하므로 노력에 비례해서 보상해주시는 것입니다. 사회에서 불만이 생기지 않게 하려면 정당한 보상이 주어져야 합니다. 달리 말하자면, 과정의 공정성이 담보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개천에서 용이 나는 시대는 이제 끝났다고 합니다. 모두 용이 될 수 없으며 또한 그럴 필요도 없다고 하면서 소위 ‘흙수저’로 치부되는 가붕개(가재, 붕어, 개구리)로 살아도 행복한 세상을 만들면 되는 것이니 출혈경쟁하지 말고 예쁘고 따뜻한 개천 만드는 데 힘을 쏟자고 했던 조국 씨의 트위터 메시지는 그 자치로서는 잘못된 말이 아니지만, 현실에서는 그의 말대로 돌아가지 않기 때문에 젊은 세대가 분노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성경은 구원받은 자가 자신의 노력 여하에 따라 받게 될 상급(reward, prize)에 차등이 있음을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일례로, 고린도전서 3장에서 사도 바울은 집 짓는 비유를 통해 이 점을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선명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라는 터 위에 집을 짓는 자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터 위에 집을 짓는 자들이 어떤 재질로 집을 짓느냐에 따라 상급이 달라집니다.

(고린도전서 3:12-15)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

마지막으로 형평성(equity)의 문제를 생각해보겠습니다. 어른과 아이에게, 그리고 정상인과 비정상인에게 꼭 같은 평가기준을 적용한다면 형평성을 잃게 됩니다. 주님은 달란트의 비유에서 바로 이 문제를 다루고 계십니다. 한 달란트 받은 자, 다섯 달란트 받은 자, 열 달란트 받은 자에게 각기 받은 만큼의 달란트를 남길 것을 요구하십니다. 성경의 수학은 절대치 수학이 아니라 상대치 수학 즉 비례의 수학입니다. 그래야 형평성에 맞기 때문입니다. 형편에 따라 출발선을 달리 한다거나 가산점을 주는 것은 불공정이 아니라 오히려 형평성을 고려한 한 차원 높은 공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난 칼럼에서 언급한 바 있는, 이스라엘 사회의 가난한 자들에 대한 배려는 비록 평등은 아니지만 공평(공정)의 한 단면을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칼럼의 내용은 본 신문사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