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유에스코리아뉴스

김재동 목사의 신앙칼럼

강남중 기자

김재동 원로목사 프로필


서울대학교 영문과, 전 청소년재단 이사장, 해외한인장로회(KPCA) 총회장 역임, 현 서울장로교회 원로목사, 전 워싱턴교역자회 회장, 전 워싱턴한인교회 협의회 회장, 목회학박사과정 수료



호모 에스페란스(희망하는 인간)



인간을 학문적으로 정의하는 다양한 학명(學名)이 있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든다면,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 지혜 있는 인간), 호모 라보란스(homo laborans, 일하는 인간), 호모 에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 경제적 인간), 호모 에티쿠스(homo ethicus, 윤리적 인간), 호모 루덴스(homo ludens, 놀이하는 인간), 호모 파베르(homo faber, 공작하는 인간) 등입니다. 이러한 학명 가운데 호모 에스페란스(homo esperans)라는 학명이 있습니다. ‘희망하는 인간’(the hoping man)이라는 뜻입니다. 심리학자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이 인간을 정의하면서 붙인 이름입니다. 토마스 칼라일은 “인간은 희망에 기초를 두고 있는 존재”라고 했습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했습니다. 인간은 희망을 먹고 사는 존재입니다. 희망이 사라질 때 인간은 존재의 이유(raison d'être)를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 과학자가 흰쥐로 실험을 했습니다. 두 개의 통에 흰쥐를 한 마리씩 가둬 놓고 하나는 뚜껑을 덮어 빛이 전혀 들어오지 않게 하고, 다른 하나는 약간 틈을 벌려 빛이 들어오게 했습니다. 그랬더니 빛이 들어오지 않는 통의 쥐는 금방 죽고 말았지만 빛이 들어오는 통의 쥐는 오래 생존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희망의 반대말은 절망입니다. 꼭 같은 상황에서 희망을 품은 사람은 다시 일어설 수 있지만 절망에 빠진 사람은 그 자리에 그냥 주저앉은 채로 다시는 일어서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한 가닥 희망을 찾으려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사면초가(四面楚歌)로 사방이 꽉 막혀 도저히 헤어날 수 없는 상황에 처한다 할지라도 정신을 바짝 차리고 그러한 때에도 언제나 확 터져있는 제 5 방향 즉 위를 쳐다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태양을 바라보는 자는 자기 그림자를 보지 못하듯이 희망을 향해 서면 절망의 그림자를 보지 않게 됩니다. 닫힌 문만 골똘히 보고 있으면 바로 그 옆에 새롭게 열린 문을 볼 수 없습니다. 미국 엽서에 자주 등장하는 격려의 메시지 중에 “한 문이 닫히면 다른 문이 열린다”(When one door shuts, another opens.)라는 말이 있습니다.

시편 42편 저자는 암울한 상황에 허우적대는 자신을 향해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Put your hope in God!)고 속삭이고 있습니다.

(시편 42:1-5)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내가 전에 성일(聖日)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감사의 소리를 내며 그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내 영호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불안(Angst)이야 말로 삶의 기본 정서”라고 했습니다. 불안은 하나님에게서 분리된 인간의 두려움에서 연유합니다. 두려움과 불안을 떨치려면 영원토록 살아 역사하시는 절대자 하나님께 희망을 두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우리의 희망을 무색하게 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합니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속담은 신뢰를 저버리는 인간의 마음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무산된 희망, 사산(死産)된 희망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잔뜩 기대를 걸었는데 그 기대가 물거품이 되고 말 때 느끼는 배신감은 기대에 비례해서 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생겨난 말이 ‘희망 고문’이라는 역설적인 표현입니다. 희망이 고문이 되는 이유는 그 희망이 근거가 없는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선거철이 되면 정치인들의 공약이 난무합니다. 그러나 일단 당선이 되고 나면 그 공약(公約)이 스르르 자취를 감추고 결국 공약(空約)이 되고 마는 예가 허다합니다. 설령 공약을 이행하려고 해도 능력과 여건이 여의치 못해 본의 아니게 헛된 약속이 되는 경우도 없진 않습니다. 어쨌든 희망 고문을 시키지 않으려면 그 희망이 단순한 희망사항(wishful thinking)이 아니라 확고한 터 위에 세워져야만 합니다.

(로마서 5:5, 8)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은 그저 립서비스에 지나지 않는 허언(虛言)이 아니라 당신의 외아들을 희생시키신 데서 확연히 입증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어떠한 상황에서도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근거입니다. 이뿐 아니라 예수님이 인간의 최대 절망이라 할 수 있는 죽음을 극복하고 부활하신 사건이야말로 인간이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우리 안에 있는 희망에 관한 이유(the reason for the hope)를 묻는 자들에게 항상 대답할 것을 예비하라고 권면했습니다(베드로전서 3:15). 그러기 위해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이 역사의 어느 시점에 실제로 일어났던 사실(事實, 史實)임을 한 치의 의심도 없이 확신하는 믿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Happy Easter!



***** 칼럼의 내용은 본 신문사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