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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동 목사의 신앙칼럼

강남중 기자

김재동 원로목사 프로필


서울대학교 영문과, 전 청소년재단 이사장, 해외한인장로회(KPCA) 총회장 역임, 현 서울장로교회 원로목사, 전 워싱턴교역자회 회장, 전 워싱턴한인교회 협의회 회장, 목회학박사과정 수료



고난의 종류와 의미



오늘은 고난주간이 시작되는 종려주일(Palm Sunday)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군중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영했다고 해서 생긴 교회절기입니다. 고난주간의 절정은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 못 박혀 돌아가신 성금요일(Good Friday)입니다. 오늘은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을 포함해 고난의 종류와 의미에 대하여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1. 형벌로서의 고난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며, 이런 성품 때문에 절대로 죄를 간과하시지 않고 반드시 죄값을 치르게 하십니다. 이러한 고난은 비단 기독교뿐만 아니라 인간의 보편적인 사상으로서 인과응보사상이 바로 형별로서의 고난을 잘 대변해주고 있습니다.

2. 징계로서의 고난

흔히 성도를 가리켜 ‘용서받은 죄인’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예수를 믿는 자들은 의롭다 여김을 받지만, 그러나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완전한 성화를 이룰 수 없기 때문에 매순간 실족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이 잘못을 깨닫고 교정하도록 하시기 위해 사랑의 매와 채찍으로 징계하십니다. 징계는 자녀들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동기가 되기 때문에 단순한 형벌과는 구분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생아가 아니라 친자녀로 여기시기 때문에 징계를 하시는 것이므로 징계를 달게 받아야 한다고 교훈하고 있습니다(히브리서 12:5-7). 우리가 고난을 받을 때 무엇보다 먼저 할 일은 내게 무슨 허물이 있는지를 곰곰이 성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허물이 깨달아지면 속히 회개하고 그 길에서 돌아서야 합니다. 그러면 그 고난은 오히려 유익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고난을 당하는 그 순간에는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그것을 참고 인내하면 마침내 좋은 결말을 보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겪은 고난은 징계로서의 고난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40년 동안 유리방랑하며 온갖 고난을 당한 직접적인 원인은 약속의 땅 가나안을 정탐한 결과에 대하여 불신앙으로 반응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그들이 당한 고난은 징계로서의 고난임이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고난을 통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마침내 복을 주시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비록 그들이 불신앙의 죄를 범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아 그들을 연단시켜 마침내 하나님의 복을 받도록 역사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이 택하신 백성을 광야로 인도하신 것은 그들이 골탕먹이시기 위해서가 결코 아니었습니다. 예레미아애가 3:33은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본심은 그들이 이러한 과정을 거쳐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고 겸손해져서 마침내 하나님의 복을 받도록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비록 우리가 실수하고 잘못하여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다 해도 절대로 그 고난을 그냥 흘려 보내버리거나 낭비해서는 안 됩니다. 고난을 리싸이클해서 유용한 물품으로 재생하는 지혜를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3. 연단으로서의 고난

성도에게는 자신에게 허물이 있어 당하는 징계로서의 고난과는 달리, 아무런 허물이 없음에도 당하는 이른 바 ‘의인의 고난’도 있습니다. 불순물이 섞인 원석 속에서 순금을 얻으려면 강한 불로 제련을 해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더욱 성숙한 신앙 수준에 이르게 하는 방편으로 아무런 허물이 없음에도 고난을 주시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을 연단으로서의 고난이라고 합니다. 욥이 당한 고난이 가장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욥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메가톤급의 고난을 당했지만, 그가 당한 고난은 궁극적으로는 연단을 위한 고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욥은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기 23:10)고 고백했으며,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기 42:5)라고 고백했습니다. 자신의 신앙은 완전무결하다고 자부하던 교만한 자기의적인(self-righteousness) 신앙에서 벗어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겸손해졌으며, 불완전한 오디오 신앙에서 보다 온전해진 비디오 신앙으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었습니다. 연단의 용광로를 통과하면서 순도 100%의 신앙으로 성장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고난은 라틴어로 트리불룸(tribulum)이라고 하는데, 원래 껍질을 벗기는 썰매 모양의 탈곡기를 의미했습니다. 껍질을 벗고 나오는 것은 아픔이 따르지만 그러한 아픔은 성장통(growing pain)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에서 유래한 영어 tribulation은 고난, 시련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앓고 나면 더 영리해지듯이, 고난으로 인해 아픔을 겪은 만큼 성숙해지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러한 고난을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기 위한 ‘불 시험’ 이라고 하면서,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즐거움과 기쁨을 얻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베드로전서 4:12-13). 이렇다 할 까닭도 없이 애매하게 고난을 당할 때 우리는 예수님이 보여주신 태도를 본보기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19-24)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4. 자발적인 고난

신앙생활이란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며 예수님을 닮아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는 적지 않은 수고와 고난이 수반됩니다. 이러한 고난은 성도가 주를 위해 당하는 고난이요 주님 때문에 당하는 고난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고난의 예로 환난, 곤고, 핍박, 기근, 적신, 위험 등을 열거한 바 있지만 이 이외에도 자발적 순교의 절정이라 할 수 있는 순교를 포함해 매우 다양한 양상의 고난이 있습니다. 자발적인 고난은 선을 행하다가 당하는 고난입니다. 성도가 자원하여 당하는 고난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런 고난을 당하는 자가 복있는 자이며, 이들을 위해 하늘에 상급이 준비되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11-12)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5. 하나님의 섭리의 수단으로서의 고난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당하는 사람의 의사나 조건과 상관없이 자신의 섭리 수단으로 고난이라는 수단을 동원하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가령 상대방의 실수로 교통사고를 당한다든지, 중개인의 실수로 금전적인 손해를 보거나 법적인 피해를 입는 경우가 바로 그러한 예에 속합니다. 때로는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사람을 잘못 만나서, 흔히 하는 말로 인복이 없어서 어려움을 당하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일전에 미국 죠지아 주 애틀란타에서 인종차별주의자의 총격에 희생당한 자들과 그들의 가족들이 당한 고난도 자신의 죄와는 무관한 고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이런 고난을 당한 교인들을 위로하는 게 무척 힘들었습니다. 고난 당할 이유가 있어 어려움을 당한 교인들을 위로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인데, 무고하게 부당한 고난을 당한 성도들에게 적절한 위로의 말을 건낸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일지는 직접 당해보지 않아도 충분히 짐작이 갈 것입니다. 이런 경우 요한복음 9장에서 주님이 친히 하신 말씀으로 위로하기도 합니다. 날 때부터 소경 된 자에 대하여 주님께서 그가 소경으로 태어난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심으로 눈을 뜬 소경뿐만 아니라 뭇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이 외에도 요셉이 당한 사건들, 사도 바울이 죄수의 신분이 되어 로마로 호송되는 도중에 일어난 풍랑 사건 등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사건들만 해도 섭리에 의한 고난의 예들을 많이 열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축복을 고난으로 포장하여 주시기도 합니다. 또 때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더 소중한 것들을 주시기 위해 하나님 보시기에 하찮은 것들을 가져가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도가 당하는 고난을 단순히 겉으로만 보아서는 안 됩니다. 믿음의 눈을 가지고 고난 속에 숨겨져 있는 하나님의 의도를 찾으려는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옥한흠 목사님의 설교집 중에 『의미 없는 고난은 없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어떤 종류의 고난이든 다 나름대로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 고난 가운데 담겨있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그 고난을 선용하여 전화위복의 복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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