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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동 목사의 신앙칼럼

강남중 기자

김재동 원로목사 프로필


서울대학교 영문과, 전 청소년재단 이사장, 해외한인장로회(KPCA) 총회장 역임, 현 서울장로교회 원로목사, 전 워싱턴교역자회 회장, 전 워싱턴한인교회 협의회 회장, 목회학박사과정 수료



상생(相生)과 기생(寄生)



상생이 ‘너도 살고 나도 살자’는 ‘win-win game’을 의미한다면, 그 반대인 공멸은 ‘너도 죽고 나도 죽자’는 ‘lose-lose game’을 의미합니다. 상생과 공멸을 생각할 때마다 가장 먼저 머리를 스쳐가는 성경구절은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갈라디아서 5:15)는 경고의 말씀입니다. 두 말할 것도 없이 우리는 당연히 피차 멸망하는 공멸의 길이 아니라 피차 사는 상생의 길을 모색하는 지혜로운 길을 택해야 할 것입니다. 미국에서 유행하는 이런 조크가 있습니다. 유대인 가게 옆에 한인 가게가 들어오면 바짝 긴장한다고 합니다. 상술에 있어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유대인들도 한국인의 집요한 상술에는 두 손 두 발 바짝 들 정도로 겁을 먹습니다. 그런데 한인 가게 옆에 다른 한인 가게가 들어서면 쾌재를 부른다고 합니다. 자기들끼리 제살깎기 가격경쟁을 벌이며 죽기살기로 피터지게 싸우다 둘 다 망하고 자기는 그저 가만히 있어도 손 안 대고 코 풀 듯이 어부지리를 얻게 될 게 뻔하기 때문입니다. 진정 현명한 자라고 한다면, 한쪽에서 모든 이득을 독식하고 다른 한쪽은 폭망(暴亡)해버리는 ‘zero-sum game’보다는 ‘win-win 전략’ 즉 상생의 길을 택해야 할 것입니다.

작년에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아카데미 작품상을 위시해 4관왕에 오르면서 이 영화 제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궁금해졌습니다. 어느 영화평론가에 의하면, 숙주인 인간 몸에 기생해서 생존하는 기생충처럼 부자들에게 빌붙어 살 수 밖에 없는 가난한 서민들의 애환, 그리고 이런 서민들을 냄새나는 하찮은 무리들로 치부해 곱지 않은 시선으로 깔보는 부자들의 그릇된 세태, 그러나 결국엔 그들도 비극적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을 풍자하는 블랙 코미디에 걸맞게 이런 제목을 붙였을 것이라는 감상평을 읽어본 적이 있는데, 저도 동네 극장에서 이 영화를 관람한 후 대충 그렇게 짐작했었습니다.

기생충과 숙주의 관계에 대해서는 공생의 관계를 포함해 매우 다양한 형태가 있기 때문에 학문적으로는 한 마디로 딱히 정리하기가 쉽지 않지만, 공생과 기생은 서로 상반되는 개념으로 언급되는 것이 일반적인 사회 통념입니다. 숙주(宿主, host)란 기생충이나 병원성 바이러스에게 영양분을 공급하고 쉼터가 되는 존재인 반면, 기생물은 피식자(被食者)인 숙주의 영양분을 빼앗아가는 포식자(捕食者)로서 때로는 숙주를 죽음에 이르게 할 수도 있는 존재입니다.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원래 박쥐가 보유하고 있던 병원균으로서 정작 박쥐는 영향을 받지 않지만 사람에게 옮겨졌을 때에는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됩니다. 이 경우 박쥐는 저수지 숙주가 되고, 사람은 1차 숙주가 되는 것입니다.

미국 사람들은 비겁쟁이를 가리켜 ‘치킨’(chicken)이라고 하는데, 이 말은 치킨게임에서 유래했습니다. 치킨게임은 두 명의 경쟁자가 도로 양끝에서 서로 차를 몰고 정면으로 달려오다가 충돌 직전에 핸들을 먼저 꺾는 쪽이 지게 되는 게임입니다. 누가 ‘비겁쟁이’인지를 가리기 위해 1950년대 미국 젊은이들 사이에 유행했던 게임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무모하기 짝이 없는 공멸의 게임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치 마주보고 전속력으로 질주하는 두 대의 기차처럼 위험천만한 장난입니다. 무한대립을 통해서는 절대로 문제가 원만하게 해결될 수 없는 것입니다. 무한경쟁사회는 남을 죽여야 내가 산다는 생각이 팽배해있습니다. 그런 현상을 게(crab)에 빗대어 묘사하기도 합니다. 게는 자기 위에 있는 동료의 발을 잡아 끌어내리는 습성이 있는데, 결국 자기 자신도 다른 게의 견제를 받아 정상에 오를 수 없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기생충과 같은 삶의 또 다른 모습이 아닐까요.

더불어 함께 잘 사는 공생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우분투’(UBUNTU)라는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좀 생소하게 들리는 이 말은 남아프리카 코사족(族) 언어인데, ‘네가 있어 내가 있다’라는 뜻으로서 상생의 의미를 잘 대변해주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아프리카 부족에 대하여 연구하던 인류학자가 한 부족 아이들을 모아놓고 게임을 하게 했습니다. 나무 옆에 아주 싱싱하고 달콤한 딸기 바구니 하나를 놓아두고 누구든지 먼저 뛰어간 아이에게 몽땅 주겠다고 했으나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 손을 잡은 채 함께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모두 둘러앉아 입안 가득히 과일을 베어 물고는 키득거리며 재미나게 먹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렇게들 하느냐?”고 묻자 ‘우분투’(UBUNTU)라는 말이 이구동성으로 터져 나왔습니다. “다른 아이들이 다 슬픈데 나만 기분 좋을 순 없잖아요? 우리가 함께 있기에 내가 있을 수 있으니까요.” 공동체의 연대의식을 이처럼 잘 보여주는 예도 찾아보기 어려울 것입니다. 백인정권의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를 극복하는데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던 넬슨 만델라 대통령이 늘 강조한 사상이 바로 이 ‘우분투’였으며, 이러한 노력을 인정받아 마침내 그는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교회야말로 그 어느 기관보다도 이 ‘우분트’ 정신을 실천해야 할 기관입니다. 한 울타리 안에서 함께 하나님을 섬기는 교인들은 평생동지를 넘어 ‘영생동지’요, 동고동락(同苦同樂)의 공동운명체의 일원임을 늘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26-27)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나니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로마서 12:15)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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