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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동 목사의 신앙칼럼

강남중 기자

김재동 원로목사 프로필


서울대학교 영문과, 전 청소년재단 이사장, 해외한인장로회(KPCA) 총회장 역임, 현 서울장로교회 원로목사, 전 워싱턴교역자회 회장, 전 워싱턴한인교회 협의회 회장, 목회학박사과정 수료



‘끄트머리’ 신앙



순수한 우리 말 중에는 서로 상반된 의미를 지닌 두 단어가 한 단어로 사용되는 경우가 꽤 많이 있습니다. 한두 가지 예를 든다면, 여닫이문, 빼닫이(서랍의 경상도 방언), 나들목과 같은 단어들이 바로 그러한 예에 속합니다. 이러한 성격을 지닌 단어 가운데 ‘끄트머리’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끝이 되는 부분’과 ‘일의 실마리’라는 두 가지 상반된 뜻이 함께 담겨 있는 중의적(重義的)인 단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단어는 우리 선조들의 지혜를 반영해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선조들은 끝을 단순히 어떤 일의 마무리로만 여기지 않고 새로운 시작의 전환점 내지는 시발점으로 볼 줄 아는 통찰력을 지니고 계셨던 것입니다.

해마다 세밑이 되면 지난 한 해를 뒤돌아보며 연말결산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새해에는 지난해에 미처 못다 이룬 계획들이나 새로운 계획들을 세우며 희망에 부풀어 한 해를 출발합니다. 한 마디로, 한 해의 끝에 서서 새해의 시작을 엽니다. 이것이 바로 ‘끄트머리’가 뜻하는 바입니다. 마지막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출발입니다. 영어로 졸업을 의미하는 단어로 보통 graduation과 commencement라는 두 가지 단어를 사용합니다. graduation은 대나무가 매듭을 짓듯이 어느 한 과정의 매듭을 짓는 것을 의미합니다. 미국에서 학년을 grade라고 하는데, 한 학년 또는 한 과정을 의미합니다. 한 과정을 마치는 것이 graduation이라면, commencement는 졸업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원래 ‘시작(beginning)’이라는 의미가 더 강합니다. 그래서 ‘끄트머리’는 commencement의 의미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과 죽음도 ‘끄트머리’의 관점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장례식을 집례할 때 “우리 믿는 자들에게는 죽음은 마지막이 아니라 영원한 삶에로 들어가는 관문(gateway)이다”라는 점을 강조하곤 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부활의 전주곡이요, 부활은 곧 영원한 삶 즉 영생으로 들어가는 길이기 때문에, 부활의 첫 열매이신 주님을 믿는 우리도 그 분을 본받아 죽음에 잇대어 영원한 삶에로 인도받게 되는 것입니다.

행복발전소 하이패밀리(Hi Family)를 창립하여 대표로 계시면서 현재 경기도 양평에 청란교회를 개척하여 담임하시는 송길원 목사님이 엔딩 플래너(Ending Planner)를 자처하고 나섰습니다. 엔딩 플래너란 유족들의 상황에 맞춰 장례 형식과 절차, 장례비용 등을 컨설팅하여 맞춤장례서비스를 해주는 사람을 말하는데, 일본에서는 이 직종이 상당한 수준으로 정착되어 있습니다. 가정사역 전문가인 송 목사님이 이른바 ‘임종 감독’을 자처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한국의 장례문화가 너무나 무의미한 허례허식에 젖어있고, 무엇보다도 장례 후에 가정이 해체되는 사례를 보면서 장례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필요성을 절감했기 때문입니다. 마침 머리를 스쳐간 단어가 ‘끄트머리’였고, 이 단어의 의미를 음미하는 중에 죽음은 떠나는 자나 떠나보내는 자에게 마지막인 동시에 또한 새로운 시작임을 깨우쳐야겠다는 사명감을 느꼈던 것입니다. 얼마 전에 95세를 일기로 돌아가신 어느 할머니의 ‘임종 감독’으로서, ‘함박웃음’을 컨셉으로 장례를 치르는 과정을 통해 장례가 반드시 슬픈 의식만은 아님을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장례용품들도 실비로 처리함으로써 비용도 많이 줄일 수 있음을 몸소 체험한 터라 장례를 기획하는 엔딩 플래너로서 남다른 보람을 느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크리스천은 인생관, 가치관, 세계관, 우주관뿐만 아니라 사생관(死生觀)도 달라져야 합니다. 우리는 이번 코로나 팬데믹을 겪으면서 그 어느 때보다도 죽음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분들이 코로나로 인해 생을 마쳤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죽음이 생각보다 가까이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죽음을 환영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특히 동양인들에게는 ‘죽음’이라는 단어는 입에 올리는 것조차 기분 나쁜 금기사항 제 1호입니다. 그럼에도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라는 명언이 웅변해주듯이, 죽음은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엄연한 현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크리스천으로서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을 위로하시며 약속하셨던 말씀을 마음 속 깊이 새겨야 할 것입니다.

(요한복음 14:1-3)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이 말씀은 예수님께도 우리에게도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임을 아주 명료한 어투로 일러주신 말씀입니다. 죽음은 ‘시작의 끝’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1942년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엘 알라메인에서 영국군이 독일군을 격파한 후에 윈스턴 처칠은 역사에 남을 유명한 연설을 했습니다.

“Now this is not the end. It is not even the beginning of the end. But it is, perhaps, the end of the beginning.

기억하고 싶지도 않은 2020년은 지나가고 이제 새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이 송구영신(送舊迎新)의 계절에 우리 모두 ‘끄트머리’ 신앙을 다시 한 번 곰곰이 묵상해보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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