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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동 목사의 신앙칼럼

강남중 기자

김재동 원로목사 프로필


서울대학교 영문과, 전 청소년재단 이사장, 해외한인장로회(KPCA) 총회장 역임, 현 서울장로교회 원로목사, 전 워싱턴교역자회 회장, 전 워싱턴한인교회 협의회 회장, 목회학박사과정 수료



심판주로 재림하실 예수님



이제 대림절의 절정인 성탄절이 막 지났습니다. 이때 우리 성도들이 깊이 묵상해야 할 주제는 재림입니다. 초림의 예수님은 구원의 주로 오셨다면, 재림의 예수님은 심판의 주로 오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인류 역사는 끝나게 됩니다. 이것이 인간의 죽음인 개인적 종말과 대조되는 우주적 종말이며, 신학자들은 이 우주적 종말을 그리스어의 맨 마지막 알파벳을 사용해 ‘오메가(Ω) 포인트’라고도 합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는 최후의 심판이 있습니다. 이때 각 개인의 인생에 대한 평가가 내려집니다.

(고린도후서 5:10)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이 말씀에서 ‘다 반드시’라는 구절은 어느 누구도 그리스도의 심판에서 예외일 수 없다는 엄연한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심판’의 대상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 이견이 있습니다. 기독교인들만을 대상으로 한다는 주장, 비기독교인들만을 대상으로 한다는 주장, 그리고 이 양자를 모두 대상으로 한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0:11-15에는 크고 흰 보좌에 앉으신 분의 심판 즉 ‘백보좌 심판’에 관해 기록하고 있는데, 이 심판은 일반적으로 불신자들이 불못(둘째 사망)에 던져지기 전의 마지막 심판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 구절 가운데 구원받을 자의 이름을 기록한 ‘생명책’도 등장하는데,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질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최후의 심판에 대한 성경구절에 대해서는 해석상 다소 이견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널리 받아들여지는 입장은, 백보좌 심판은 지옥행과 천국행을 가리는 심판으로 그리고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의 심판은 성도들의 상급을 매기는 심판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요는 불신자든 신자든 최후에는 반드시 살아온 삶에 대한 평가가 있다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생 결산이 있으며, 그 결과에 따라 인생 성적표를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요즘 한국에서는 트롯 열풍이 들불처럼 번지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방송국들이 경쟁적으로 경연 프로그램을 방영하고 있습니다. 경연이다 보니 으레 판정단이 있게 마련이고, 판정단의 평가에 의해 당락과 순위가 결정됩니다. 그런데 시청자들 중에는 판정단의 평가를 못마땅하게 여기며 불평을 늘어놓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떤 프로그램에서는 최저 점수와 최고 점수를 제하고 나머지 점수들을 합산하는 궁여지책도 강구해보지만, 이것 역시 만족스럽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판정단 중에는 전문성을 지닌 분들도 있지만, 그들도 어차피 주관적인 판단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나름 객관적으로 엄정하게 평가를 한다고 해도 완벽할 수는 없습니다.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그들도 어쩔 수 없이 불완전한 인간이니까요.

인간의 판단은 인간의 불완전함 때문에만 문제가 되는 게 아닙니다. 흔히들 말하기를 사람은 자기 자신 안에 두 마리 개를 키우고 있다고 합니다. 선입견과 편견이라는 개[犬]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주관적인 판단을 하게 되고, 또 때로는 이중잣대(double standard)를 들이대기도 합니다. 우리의 판단의 잣대는 한결같지 않습니다. 일관성 없이 들쭉날쭉 합니다. 그래서 남이 타협하면 ‘야합’이 되고, 내가 타협하면 ‘양보’가 됩니다. 남이 한 우물을 파면 ‘우물 안 개구리’가 되고 내가 한 우물을 파면 ‘전문가’가 됩니다. 남이 외도를 하면 ‘불륜(스캔들)’이 되고 내가 똑같은 일을 하면 ‘로맨스’가 됩니다. 그래서 나온 말이 ‘내로남불’이라는 토종 사자성어가 아닙니까. 한국의 교수들이 선정한 2020년 사자성어는 내로남불을 한자식으로 표현해 만든 ‘아시타비(我是他非)’라고 합니다. ‘나는 옳고, 남은 그르다’는 뜻입니다. 특히 최근 한국의 정치상황을 비틀어 풍자하고 있는 신조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선입견도 편견도 없으신 분입니다. 그 분에게는 한 치의 오차도 허락되지 않습니다. 흔히들 인생에는 세 종류의 저울이 있다고 합니다. 나의 저울, 남의 저울 그리고 하나님의 저울입니다. 두 가지 인간의 저울은 매우 주관적이며 또한 부분적이서 믿을 수가 없습니다. 마치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며 내리는 판단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저울은 틀림없는 엄정한 저울입니다. 그 누구도 눈가림으로 속일 수가 없습니다.

다니엘서 5장을 보면, 바벨론의 마지막 왕인 벨사살이 귀족 천 명을 위해 큰 잔치를 배설하고 술로 흥취가 고조되자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탈취해온 그릇들로 술을 따라 마시자 벽에 손가락이 나타나 글을 쓰는데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는 글이었습니다. 벨사살의 얼굴이 백짓장처럼 창백해지고 오금이 저려 사시나무 떨 듯 바들바들 떨고 있을 때 그 글자를 해석하기 위해 불려온 다니엘이 이 글을 풀이하는데, 그 내용인즉 “하나님이 이미 왕의 나라의 시대를 세어서 끝나게 하셨고, 왕을 저울에 달아보니 부족함이 보였으며, 왕의 나라가 나뉘어서 메대와 바사 사람에게 준 바 되었다”는 뜻이었습니다. 어떻게 되었나요? 하나님의 저울에 달려 부족함이 보였던 벨사살은 그날 밤 살해를 당하게 되고, 바벨론은 메대 사람 다리오에게 넘어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저울은 이토록 엄정한 것입니다.

나훈아 가수는 ‘테스형’에서 “죽어도 오고 마는 내일이 두렵다”고 노래하고 있는데, 죽어도 오고 마는 심판의 날이 있음을 기억하고 그날 주님으로부터 “착하고 충성된 종아, 참 잘 살았구나!”라는 칭찬을 받을 수 있도록 매순간 인생의 내신성적을 올리는데 힘써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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