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동 원로목사 프로필
서울대학교 영문과, 전 청소년재단 이사장, 해외한인장로회(KPCA) 총회장 역임, 현 서울장로교회 원로목사, 전 워싱턴교역자회 회장, 전 워싱턴한인교회 협의회 회장, 목회학박사과정 수료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

평화란 무엇인가? 이 물음에 답하려면 먼저 평화의 반대말을 생각해보면 좋을 것입니다. 톨스토이의 유명한 소설 『전쟁과 평화』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화의 반대말이 전쟁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러나 전쟁이 없다고 평화로운 상태가 되는 것은 아니니 그 대답도 정확한 대답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현대에는 평화의 개념이 전쟁을 넘어 사람들을 괴롭히고 희생시키는 문제, 그리고 심지어 생태계를 교란시키는 모든 현상까지 포괄하는 넓은 의미로 점차 확대되어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평화의 참뜻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유대인들의 평화(샬롬, shalom)의 개념을 이해하는 것이 도움이 되리라 봅니다. 샬롬은 매우 다양한 의미를 지닌 단어입니다. 저는 신학교에서 신약학 교수님이 설명해주신 샬롬의 개념을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샬롬은 조금도 찌그러지지 않은 동그란 정원(正圓)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조금도 왜곡되거나 결핍이 없는 완벽한 상태가 바로 샬롬이라는 것입니다. 샬롬은 유대인들의 인사이기도 한데, 한국인의 ‘안녕’이라는 말이 비교적 그 의미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우리가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할 때는 매우 복합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심신이 두루 편안하고, 식생활을 위시해 만사가 형통한지 모든 안부를 한꺼번에 물어보는 매우 함축적인 인사입니다. 샬롬은 한 마디로 만사형통한 상태를 일컫는 히브리적인 특수 단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샬롬은 모든 차원의 관계에 있어서 막힘이 없는 극히 조화로운 상태를 의미합니다. 가장 가까운 이웃이라 할 수 있는 가족과의 화목으로부터 먼 이웃인 다른 종족들이나 국가들과도 갈등이 없는 화평과 평화, 자연과 상생하는 조화로운 상태, 자기 자신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내적인 갈등과 부정적인 감정으로부터 자유로운 마음의 평정,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과 막힘이 없는 화평한 소통, 이렇게 사중적(四重的, four-fold) 샬롬이 이루어질 때 완전한 샬롬이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으며, 이것이 요즘 모든 사람들이 추구하는 진정한 ‘웰빙의 삶’인 것입니다.
샬롬이야말로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이요, 이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예수님은 이 땅에 ‘평화의 왕’으로 보내심을 받은 것입니다. 따라서 샬롬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바로 크리스천의 소명인 동시에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에 동참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샬롬을 구원의 또 다른 개념인 ‘화해(reconciliation)’와 사실상 같은 차원으로 보는 학자들도 없지 않습니다.

특히 크리스천은 먼저 하나님과 수직적인 샬롬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죄를 짓지 말아야 하며, 죄를 짓더라도 속히 회개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음으로, 이웃과 수평적인 샬롬을 이루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인간관계에서 가급적 갈등을 피해야 하며, 갈등이 생기더라도 속히 해결하고 다시금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이렇게 종적인 샬롬과 횡적인 샬롬이 교차하는 지점에 내 자신과의 샬롬이 자리잡게 되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관리하도록 위탁해주신 자연을 잘 관리하고 다스리는 ‘자연의 청지기’ 직분을 성실하게 감당함으로써 우리의 샬롬을 방해하고 앗아가는 모든 요소들을 방지하고 제거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인간이 자연환경을 훼손하고 적대적으로 대할수록 자연도 우리 인간에게 적대적으로 대하며 피해를 입히는 것은 우리가 늘 일상적으로 겪는 익숙한 경험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꼭 명심해야 할 것은 샬롬이 정의와 나란히 가야 한다는 점입니다. 기독교의 인간관은 성악설입니다. 인간은 원죄의 죄성을 가지고 태어난 죄인이며, 따라서 그러한 인간이 만들어내는 사회도 타락한 사회라는 것은 현실적으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니콜라스 월터스토프(Nicholas Walterstorff)는 『정의와 평화가 입맞출 때까지』(Until Justice and Peace Embrace)라는 책에서 시편 85:10-11을 인용하면서 이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시편 85:10-11) “인애와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으며, 진리는 땅에서 솟아나고 의는 하늘에서 굽어보도다.”

이 성경구절이 교훈하듯이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출 때까지는” 진정한 샬롬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정의가 없는 평화는 거짓평화요, 평화가 없는 정의는 냉혹한 정의입니다. 은퇴 후 저희 교단에 속해있는 한 교회의 담임목사가 갑자기 사임하는 바람에 텍사스 주에서 약 3개월 정도 임시담임목사로 목회를 한 적이 있는데, 그곳에서 ‘Justice of the Peace’라는 안내표지를 보고 무슨 일을 하는 기관인지 궁금해서 알아본 적이 있는데, 비교적 경미한 쟁송 사건을 다루는 하급 사법기관이었습니다. 그 이름에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듯이, 어떤 억울한 일을 당한 힘없는 자들을 위해 약식재판을 주업무로 삼는 기관이었습니다. 이 땅에 진정한 샬롬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정의가 함께 구현되어야 한다는 점을 일깨워주고 있는 사법기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곧 성탄절을 맞이하게 됩니다. 우리 조국이나 미국의 현실을 지켜보면서 너무나 갈등의 골이 깊어졌구나 하는 한탄을 금할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 평화의 왕으로 오신 주님을 기리는 이 절기를 맞아 깊숙이 패인 골이 조금이라도 메꿔질 수 있었으면 하는 소망을 갖고 기도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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