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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동 목사의 신앙칼럼

강남중 기자

김재동 원로목사 프로필


서울대학교 영문과, 전 청소년재단 이사장, 해외한인장로회(KPCA) 총회장 역임, 현 서울장로교회 원로목사, 전 워싱턴교역자회 회장, 전 워싱턴한인교회 협의회 회장, 목회학박사과정 수료



종교개혁의 선구자 마틴 루터



어제는 종교개혁 503주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오늘은 종교개혁에 불을 붙인 마틴 루터의 생애를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합니다.

E. S. Moyer가 쓴 『인물 중심으로 본 교회사』에 의하면, 루터는 독일 중부지방 Eisleben에서 7남매의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신실한 광부였고 어머니는 경건한 부인이었습니다. 그런 환경 속에서 루터는 소년시절부터 사도신경, 십계명, 주기도문 등을 부모에게서 배우며 자랐습니다. 그는 대학생이 되기 전에는 수도사들에 의해 교육을 받았고, 대학 졸업 후에는 어거스틴파 수도원에 들어가 수도사 생활을 했습니다. 그가 신앙생활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대학시절 중병으로 고생한 경험도 있었지만, 어느 날 절친과 함께 폭풍우가 몰아치는 길을 걷다가 친구가 바로 곁에서 벼락을 맞아 죽는 가슴 아픈 경험을 한 이후 인생의 의미에 대하여 고민을 하던 중 신앙에 귀의하게 된 것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는 그 후 비텐베르그 대학교의 교수로 있다가 모교인 에르푸르트 대학교의 전임교수로 영전했습니다. 그리고 종교개혁을 일으키기 7년 전 1510년에는 어거스틴 수도단의 중책을 맡아 로마로 파송되었습니다. 거기서 그는 유명한 스칼라 상타 성당의 28계단을 무릎으로 기어오르며 고행을 통해 속죄를 받으려고 무던히 애썼지만 결국 마음의 평안을 얻지 못했습니다. 실의에 빠진 나머지 그는 독일로 돌아와 이전에 봉직했던 비텐베르그 신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시편, 로마서, 갈라디아서, 히브리서를 강의했습니다. 비록 신학박사로서 학생들을 가르치고는 있었지만 정작 그 자신은 아직도 구원의 진리를 깨닫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던 중 신학교의 탑 속에 있는 연구실에서 로마서 강의를 준비하던 중 로마서 1:17의 말씀에 부딪히게 됩니다. 이것이 그의 생애를 완전히 뒤바꾸어 놓은 소위 ‘탑의 체험’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 한 구절 속에서 그는 드디어 복음을 발견하게 되고 구원의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고행이나 자선과 같은 인간의 노력이나 선행이나 공적으로 구원받는 게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값없이 구원을 받는다는 복음의 진리를 발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그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던 것은 그 당시 중세 로마교회의 상황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 당시 중세교회는 수도원의 성적 문란, 성직매매, 면죄부(免罪符) 판매 등에서 볼 수 있듯이 도덕적인 면에서뿐만 아니라 성경적으로도 정도(正道)에서 너무나 멀리 벗어나 있었습니다. 이 중에서도 특별히 신학자 루터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던 것은 면죄부 판매였습니다.

로마 교황 레오 10세는 성 베드로 성당 수축에 필요한 재정충당을 위해 면죄부 판매라는 아이디어를 짜냈습니다. 성당 수축을 명분삼아 살아있는 자를 위한 면죄부는 물론이요 죽은 자를 위한 면죄부까지 팔았습니다. 면죄부(Indulgence)란 말 그대로 죄를 사해주는 증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정한 돈을 내면 면죄부를 살 수 있는데, 돈 액수에 따라 면죄부의 효력도 달랐습니다. 사죄의 효력에 따라 가격도 달랐습니다. 면죄부를 사면 이미 죽어 연옥에 가있는 자들까지도 죄 사함을 받고 천국으로 옮겨질 수 있다는 감언이설에 속아 앞 다투어 고액의 면죄부를 샀습니다. 로마 교황청은 가능한 한 많은 기금을 모우기 위해 유럽 각국에 사절단을 파송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사람이 독일로 파송된 텟젤이었습니다. 달변가인 그는 “죽은 조상의 면죄부를 사는 사람은 이 헌금함에 동전이 땡그랑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연옥에 갇혔던 불쌍한 영혼들이 천국으로 올라간다”고 외쳤습니다. 도무지 말도 되지 않는 면죄부 판매에 격분한 루터는 드디어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그 성당 정문에 95개조의 항의문을 내걸었고, 이것이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되었던 것입니다.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의 기치를 올리자 여러 나라에서 그에게 동조하는 자들이 일어났습니다. 스위스의 쯔빙글리, 프랑스의 깔뱅, 스코틀랜드의 존 녹스 같은 걸출한 자들의 열화와 같은 지지와 활약에 힘입어 유럽 전역에 종교개혁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당황한 로마 교황은 루터를 파면하고 그의 신부직을 발탁해버렸습니다. 그리고 감히 로마 교황청에 반기를 들었다고 해서 ‘반항자’로 낙인을 찍어버렸습니다. 오늘날 개신교 신자들을 ‘Protestant’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여기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루터는 그 이후 온갖 탄압과 박해와 위협에 시달려야만 했지만 끝내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한번은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 독일의 보름스에서 국회가 열렸고 루터는 여기에 출두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가지 말라고 만류했지만 그는 “보름스 국회의 기왓장들처럼 많은 마귀가 나를 겨누고 있더라도 나는 단연코 가리라!”고 하면서 출두를 감행했고, 자기를 심문하는 현장에서 “오, 하나님, 제가 여기 서있나이다. 저를 도우소서!”라고 기도했던 유명한 일화는 지금도 자주 회자되고 있습니다.

루터의 업적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한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성경은 라틴어 성경이었고, 오직 성직자들만이 읽을 수 있는 ‘닫힌 책’이었습니다. 성경은 성직자들의 전유물이었고, 그들은 의도적으로 성경의 자국어 번역을 억제했습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루터가 자국어로 성경을 번역했다는 것은 얼마나 위대한 업적인지 모릅니다.

그는 ‘닫힌 책’을 ‘열린 책’으로 바꾸었습니다. 그의 업적은 독일 국민들은 말할 것도 없고 기독교계 전반에 위대한 공헌을 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루터 덕분에 누구나 성경을 읽고 구원의 진리를 깨달을 수 있게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릅니다. 필요할 때마다 예비하신 자들을 통해 구원의 역사를 면면히 이어가시는 하나님의 역사에 감탄하며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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