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동 원로목사 / 프로필
서울대학교 영문과, 전 청소년재단 이사장, 해외한인장로회(KPCA) 총회장 역임, 현 서울장로교회 원로목사, 전 워싱턴교역자회 회장, 전 워싱턴한인교회 협의회 회장, 목회학박사과정 수료, 워싱턴신학교(WTS) 기독교교육 박사과정 이수 중, PDSO, 강사
건천 신앙과 옹달샘 신앙

지난 주일은 교회력으로 성령강림주일이었습니다. 성탄절, 부활절과 함께 기독교 3대 절기인 성령강림주일은 오순절 성경강림 사건을 기념하는 절기로서, 교회의 탄생일이라고도 할 수 있는 매우 의미있는 절기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이 땅에 40일 동안 계시다가 승천하신 지 열흘 후에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성령님이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하던 120문도에게 임하셨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사도들이 부활의 증인으로 자처하며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게 되었고, 사도들의 설교를 들은 자들 수천 명이 일시에 주님께로 돌아오는 놀라운 대부흥의 역사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성령님의 역사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본다면, 복음을 듣고 회심하여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게 하는 중생(거듭남, born again)의 역사,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자로서 삶 속에서 예수님의 제자로 살 수 있도록 역동적인 능력을 부여하는 성령충만의 역사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모든 사람에게 물어야 할 두 가지 질문은, “당신은 성령으로 거듭났습니까?”라는 질문과 “당신은 성령충만한 사람입니까?”라는 질문입니다. 오늘은 두 번째 질문과 관련해 건천 신앙과 옹달샘 신앙에 대하여 상고해보려고 합니다.
건천(乾川)은 평소에는 물이 흐르지 않아 바짝 말랐다가 비가 와서 물이 불어나면 때로는 범람하기도 하는 간헐하천을 말합니다. 서아시아와 북아프리카 등 기후가 건조한 지역에서 볼 수 있는 간헐천은 사막 지역에서는 와디(wadi)라고 합니다. 건천의 존재는 우기에 의존하고 있는 셈입니다. 신앙유형에도 건천과 같은 신앙이 있습니다. 어떤 계기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 싶으면 감사하며 헌신적으로 섬기고, 심지어는 그 어려운 원수사랑까지 실천하다가도 별치않은 일로 시험을 당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완전히 180도 돌변해버리는 자들의 신앙유형이 바로 건천신앙입니다. 흔한 일은 아니지만 순간적인 충동으로(?) 오지 선교사로 헌신하겠다고 대중 앞에서 공표하는 일도 없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어떤 사정으로 은혜의 우기가 지나고 나면 바짝 메마른 팍팍한 심령의 바닥을 드러내는 와디 신자로 바뀌고 맙니다. 한 마디로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자들이 바로 건천 신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목회를 하다보면 이런 교인들을 심심찮게 만나게 됩니다. 이런 교인들로 인해 목회자도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헷갈릴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오죽하면 미국 교계에서조차도 “성도를 사랑하라, 그러나 믿지는 말라”라는 말이 나왔을까 싶습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옹달샘 신앙은 꾸준함이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옹달샘은 화려하지도 크지도 않은 한낱 웅덩이에 불과하지만 가뭄을 타지 않고 끝없이 물이 솟아오릅니다. 건천이 외부의존형이라면 옹달샘은 내부의존형입니다. 존재의 근거가 내면에 있습니다. 옹달샘 신자는 외부 환경에 휘둘리지 않고 내면의 힘으로 모든 환경을 극복해냅니다. 충만함의 근원이 바깥이 아니라 자기 자신입니다. 좀 더 적확하게 말한다면, 옹달샘 신자의 충만함의 근원은 어제도 오늘도 영원토록 동일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히브리서 13:8). 주님이 생수의 근원이시며, 따라서 옹달샘의 물줄기는 마르는 법이 없습니다.
(요한복음 7:37-39)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옹달샘 신앙의 꾸준함은 성령충만에 의해 가능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령충만의 의미를 오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성령충만은 성령을 여러 개 많이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즉 양적 개념으로 착각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심지어 목사들조차도 이미 성령을 받고 그리스도인이 된 자들을 향해 “성령 받으라!”고 무식한 말을 하는 자들이 없지 않습니다. 이미 하늘 나라에 가셨지만, 저희 교회 어느 장로님은 주일예배 시간에 대표기도를 하실 때마다 “우리 목사님 성령 받게 해주시옵소서!” 하고 기도하시곤 했습니다. 그 기도를 들을 때마다 조금은 자괴감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내가 아직도 성령 받지 못한 목사로 생각하시는가? 물론 그 장로님의 속뜻을 모르는 바 아닙니다. 그 장로님의 속뜻은 “우리 목사님이 성령충만하셔서 사역을 힘있게 감당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라는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성령충만은 양적인 개념이 아니라 관계적인 개념이며 상태적인 개념입니다. 즉 성령님께 순종하는 정도를 의미합니다. 성령님을 의지하고 순종하려면 말씀으로 충만해야 하고, 그 결과로 예수님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성령충만은 곧 ‘말씀충만’이요 ‘예수충만’이라고 에둘러 말하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은 믿는 자로서 옛사람의 행실을 버리고 새 사람으로 살라고 하면서 “성령충만을 받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5:16-18)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여기서 “세월을 아끼라”는 말은 원문에 충실하게 번역하면 “시간을 구속하라(Redeem the time)”입니다. 즉 “사탄에게 빼앗긴 시간을 되찾아내라, 그래서 빛의 자녀답게 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성령충만한 상태에서만 가능하기에 성령으로 충만해져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해져라(be filled with the Spirit)”는 이전의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보다는 다소 나아진 번역이나 아직도 성령충만을 양적인 개념으로 오해하도록 할 소지가 있습니다. 이왕 새로 번역하는 것인데 차라리 “성령충만한 상태가 되라”는 식으로 번역했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을 가져봅니다. 어쨌든 성령충만은 양적인 개념이 아니라 관계적 개념 내지는 상태적 개념임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옹달샘 신앙은 예수님과 긴밀한 영적 교제를 유지하면서 그분께 온전히 순종함으로써 성령충만한 가운데 삶 속에서 말씀을 구체적으로 살아내는(living out the Word of God) 신앙임을 마음에 새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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