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동 원로목사 / 프로필
서울대학교 영문과, 전 청소년재단 이사장, 해외한인장로회(KPCA) 총회장 역임, 현 서울장로교회 원로목사, 전 워싱턴교역자회 회장, 전 워싱턴한인교회 협의회 회장, 목회학박사과정 수료, 워싱턴신학교(WTS) 기독교교육 박사과정 이수 중, PDSO, 강사
하나님의 길과 인간의 길

‘길’은 순 우리 말입니다. 길은 고작 한 음절의 짧은 단어이지만 이 단어가 함의(含意)하고 있는 의미는 매우 다양하고 풍부합니다. 길은 도로나 거리와 같은 단어들이 주지 못하는 문학적이고 철학적인 어감을 풍깁니다. 길은 단순히 사람이나 차가 다니는 도로 이상의 중의적(重義的)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연의 일치라고 해야 할는지 모르지만, 영어 단어 way도 길이라는 뜻 외에 방법, 수단, 도리, 방향, 행로 등 다양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으며, 동양에서 도(道)라는 말도 이에 못지않게 다양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55:6-8)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이 세상에서 가장 먼 거리를 말할 때 ‘하늘과 땅만큼’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이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의 길과 인간의 길은 천양지차(天壤之差)입니다. 하나님의 길이 하늘이라면 인간의 길은 땅입니다. 이 말씀에서 ‘길’과 ‘생각’은 의미상 동의어입니다. 잠언에서 많이 발견할 수 있는데, 히브리적 표현 방법 중에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가급적 같은 표현을 피하고 다른 표현으로 중복해서 기술하는 예가 많이 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는 잠언 9:10이 좋은 예라 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과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 그리고 ‘지혜의 근본’과 ‘명철’은 사실상 동일한 의미를 다른 표현으로 중복해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길’과 ‘하나님의 생각’은 의미상 같은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악한 자와 불의한 자가 그 길에서 돌아서서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면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시고 무조건 용서해주신다는 생각, 이것은 인간의 생각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인간은 죄와 불의의 대가를 치러야 용서해주지만 하나님은 이것저것 따지시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용서해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희게 되리라”(이사야 1:18)고 하셨고, “나는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이사야 43:25) 하셨으며,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멀리 옮기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시편 103:10-12) “우리의 죄과를 따라 우리를 처벌하지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우리에게 그대로 갚지는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의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하나님의 길과 생각이 우리의 길과 생각과 천양지차로 다른 것은 비단 용서에 관해서만이 아닙니다. 성경을 읽다 보면 하나님은 때로 너무나 엉뚱한 분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카락까지도 세실 만큼 우리의 일상에 밀착해계시는 분이기 때문에 우리가 자칫 하나님을 우리의 잣대로 재려고 하고, 우리의 눈높이로 끌어내리려는 우를 범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안에 내재해 계시는 분임과 동시에 우리 위에 초월해 계시는 분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안에 계실 만큼 작아지시기도 하지만 우주 만물보다 더 크신 분이기도 합니다. 신학자 칼 바르트가 지적한 대로, 하나님은 인간을 찾아오신 분이시며 동시에 절대적 타자(他者)이십니다.
(전도서 5:2)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무신론자나 불신자들은 하나님도 이성적인 영역에서 이해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이성적 판단에 부합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합니다. 물론 이성도 하나님이 인간에게 부여해주신 것이므로 최대한 활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성적인 추구나 추론 자체를 죄악시하거나 정죄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성은 한계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유한은 무한을 내포할 수 없다”(finitum non capax infiniti)라는 유명한 신학적 명제가 나오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성적으로 추론하다가 막다른 벽에 부딪히면 그때는 신앙으로 도약해야(take off) 합니다. 11세기 후반 캔터베리 대주교인 안셀무스(Anselmus)는 “나는 이해하기 위해서 믿는다”(Credo ut intelligam)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일반적으로는 알고 나서 믿기 것이 순서이지만, 기독교 진리 중에는 믿어야 비로소 알게 되는 진리들도 많이 있음을 일깨워주는 명언입니다. 우리는 비록 이성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성숙한 크리스천이 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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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레 쓸라(apres cela, 그 다음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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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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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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