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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동 목사의 신앙칼럼

강남중 기자

김재동 원로목사 프로필


서울대학교 영문과, 전 청소년재단 이사장, 해외한인장로회(KPCA) 총회장 역임, 현 서울장로교회 원로목사, 전 워싱턴교역자회 회장, 전 워싱턴한인교회 협의회 회장, 목회학박사과정 수료



삶의 우선순위



인생의 우선순위를 주제로 설교할 때 자주 인용하는 예화가 있습니다. 인용하는 자에 따라 다소 버전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대체로 이런 내용입니다.

하버드 대학교에서 시간관리에 관한 강의로 유명한 어느 경영학 교수가 인생의 우선순위를 가르치기 위해 한 가지 구체적인 예를 들었습니다. "자, 퀴즈를 하나 풀어 봅시다.” 그는 테이블 밑에서 커다란 병 하나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주먹만 한 돌을 꺼내 병 속에 하나씩 넣기 시작했습니다. 병에 돌이 가득 차자 "이 항아리가 가득 찼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학생들은 이구동성으로 "예!”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다시 테이블 밑에서 작은 자갈을 한 움큼 꺼내서 병에 집어넣고 흔들었습니다. 돌 사이로 자갈이 들어차자 "이제는 이 병이 가득 찼죠?” 하고 다시 물었습니다. 이번에는 학생들이 얼른 대답을 못하고 머뭇거렸습니다. 교수님은 다시 테이블 밑에서 모래주머니를 꺼내더니 돌과 자갈 사이의 빈틈을 가득 채운 후 이어서 주전자를 꺼내 병에다 물을 부었습니다. 그런 후에 이 실험의 의미를 설명해주었습니다.

“만일 큰 돌을 먼저 넣지 않고 다른 것들로 병을 채웠더라면 큰 돌은 영영 넣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큰 돌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인생에서 우선순위를 바로 세워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자신의 인생에서 무엇이 ‘큰 돌’에 해당하는지는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직업과 돈일 수 있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가정과 가족일 수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에게는 건강이나 복지가 가장 큰 가치일 수 있습니다. 학문과 종교를 맨 앞자리에 두는 자들도 있을 것입니다.

삶의 우선순위와 관련해 그리스도인들의 머리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성경 구절은 아마도 마태복음 6:33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이 구절에서 나라(kingdom)와 의(righteousness)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해석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전후 문맥을 따라 대체적인 의미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구절 앞부분은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한 부분입니다. 공중의 새가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않지만 하늘 아버지께서 먹여 기르시고, 들의 백합화가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지만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못할 만큼 하나님께서 친히 자라게 하시고 꽃피우게 하시지 않느냐는 말씀입니다.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 즉 의식주에 관련된 것들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시는 하늘 아버지께서 이러한 미물들도 자상하게 보살펴주실진대 하물며 이들과는 비할 바 없이 존귀한 당신의 자녀들의 필요를 채워주시지 않겠느냐, 그러니 염려일랑 묶어두고 ‘먼저’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을 우선적으로 하라, 그리하면 그 나머지는 그분이 알아서 해주실 것이다, 그런 의미로 새기면 무난하리라 봅니다. 물론 여기엔 이러한 믿음이 필요하지만...

스티븐 코비는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에서 일의 유형을 네 가지, 즉 중요하고 급한 일, 덜 중요하고 급한 일, 중요하고 덜 급한 일, 덜 중요하고 덜 급한 일로 분류했습니다. 물론 최우선 순위는 중요하고 급한 일일 것이며, 맨 나중 순위는 덜 중요하고 덜 급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긴급성과 중요성 사이에서 판단하기가 매우 어려운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 이런 경우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려면 긴급성보다는 중요성을 우선순위에 두는 게 지혜로운 처신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지침입니다.

작년 2월에 88세로 소천하신 이어령 교수님이 사랑하는 딸 이민아 목사를 먼저 하늘 나라로 보내고 나서 쓴 <딸에게 보내는 굿나잇 키스>라는 글이 우리의 심금을 울립니다. 그분은 젊은 시절 학문과 저술에 전념하느라 어린 딸이 새 잠옷을 입고 자랑도 하고 굿나잇 인사도 드릴 겸 서재 문을 두드릴 때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그저 건성으로 ‘굿나잇 민아’하기도 하고, 때로는 일에 방해된다고 짜증을 내는가 하면, 애 잘 보라고 큰 소리로 아내를 다그치기도 했습니다. 그런 그가 노후에 어느 날 딸이 생전에 했던 인터뷰 기사를 읽던 중 어린 딸이 이러한 아버지를 이해는 하면서도 몹시 야속하고 서운했으며, 때론 아빠가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줄 알았다고 언급한 내용을 읽고는 깊은 회한에 잠겨 딸에게 편지를 씁니다.

“나에게 만일 30초의 시간이 주어진다면 딱 한 번이라도 좋으니 낡은 비디오테이프를 되감듯이 그때로 돌아가자. 나는 그때처럼 글을 쓸 것이고 너는 엄마가 사준 레이스 달린 하얀 잠옷을 입거라. 그리고 아주 힘차게 서재 문을 열고 “아빠, 굿나잇”하고 외치는 거다. 약속한다. 이번에는 머뭇거리며 서 있지 않아도 돼. 나는 글 쓰던 펜을 내려놓고, 읽다만 책장을 덮고, 두 팔을 활짝 편다. 그런데 어찌하면 좋으니. 내가 눈을 떠도 너는 없으니...굿나잇 민아야, 잘 자라 민아야, 보고 싶다 내 딸아.”

비단 신앙생활이 아니더라도, 우리 또한 ‘급한 일’을 한답시고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며 후회할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지, 이 시간 눈을 감고 조용히 묵상해보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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