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동 원로목사 프로필
서울대학교 영문과, 전 청소년재단 이사장, 해외한인장로회(KPCA) 총회장 역임, 현 서울장로교회 원로목사, 전 워싱턴교역자회 회장, 전 워싱턴한인교회 협의회 회장, 목회학박사과정 수료
예수님의 모형②: 사건

예수님은 민수기 21장에 기록되어 있는 놋뱀 사건을 언급하시면서 이 사건이 곧 자기 자신의 십자가 사건을 예표하는 모형적인 사건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3:14-16)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한 후 광야에서 이동할 때 험한 길로 인해 속상해하며 하나님과 모세에 대하여 원망하며 불평했습니다.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면서 부글부글 속을 끓이며 불평을 쏟아놓았습니다. 저는 수년 전에 요르단 성지순례를 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여정의 일부를 직접 눈으로 볼 기회가 있었는데, 그 당시 광야길이 얼마나 황량하고 험했을지 쉽게 짐작이 갔습니다. 그들이 불평하자 하나님은 사막의 불뱀 즉 독사들을 불러 모아 이스라엘 백성을 사정없이 물게 하셨습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습니다. 다급해지자 그들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못마땅하게 여겼던 모세에게 중보기도를 요청했습니다.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함으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그래서 모세가 백성을 위해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놋으로 불뱀 형상을 만들어 장대에 매달라고 하시면서 뱀에게 물린 자는 누구든지 그 장대를 쳐다보면 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과연 말씀하신 대로 놋뱀을 쳐다본 자들은 신통하게도 거짓말처럼 죽지 않고 살아날 수 있었다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건이 그저 광야 생활 중 우연히 일어난 하나의 해프닝이 아니라 바로 당신 자신의 십자가의 사건을 보여주는 하나의 모형적인 사건이라고 친히 해석해 주신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모세가 생을 마감한 느보산 정상에 세워진 모세 박물관 앞에 이 사건을 기념하는 형상이 세워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모압 지역인 느보산에서 가나안 땅을 바라보며 자신은 비록 들어갈 수 없지만 백성들이 그곳에 들어가 지켜야 할 계명들을 절절한 마음으로 설파했던 사실을 기억하며 그곳에서 가나안 여러 지역까지의 거리가 적힌 팻말들을 한 묶음으로 만들어 함께 매달아놓은 것도 볼 수 있었습니다.

놋뱀 사건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사건이었습니다. 독사에세 물렸으면 해독제를 바르거나 독이 더 이상 퍼지지 않도록 단단히 묶거나 하는 처방을 내리는 것이 상식인데, 그냥 장대에 달린 놋뱀을 쳐다보기만 하면 낫는다는 것은 마치 한 편의 코미디와 같은 처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무런 죄도 없으신 분이 우리의 죄를 대신 속하려고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우리 대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대속을 이루셨다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이보다 한 단계 더 높은 차원의 처방으로서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는 미련하기 그지없는 사건입니다(foolishness, 고린도전서 1:23).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 사건을 언급하시면서 곧바로 이어서 소위 ‘소복음’(little Gospel)으로 일컬어지는 16절의 말씀을 하셨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십자가 사건이 백성들의 반역과 로마 당국에 의해 그저 우연히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해 하나님의 섭리적인 계획에 따라 필연적으로 일어났어야만 할 사건이라는 사실을 믿도록 치밀하게 의도적으로 미리 복선을 깔아놓으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모형이 되는 사건을 하나 더 생각해보자면, 요나의 사건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2:38-41)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요나의 사건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요나의 사건을 들어 자신의 부활을 예고하셨습니다. 요나의 사건도 인간의 이성이나 합리적인 사고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사건입니다. 사도 요한은 기적(miracle, wonder)이라는 단어 대신 의도적으로 표적(sign)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표적이란 말 속에는 예수님이 메시야 되심을 보여주는 증좌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요나의 사건은 분명히 기적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은 기적 중의 기적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야말로 예수님의 메시야 되심을 입증해주는 가장 강력한 표적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쉽게 믿질 않습니다. 그래서 독일의 신학자 불트만은 예수님의 부활이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신화적 사건이라고 주장하면서 성경의 ‘비신화화’를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 자신의 부활이 역사적인 사건일 것임을 미리 암시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요나의 경고 메시지를 듣고 앗수르 제국의 수도인 니느웨 사람들은 회개한 반면 예수님은 자기의 심판의 메시지를 듣고도 도무지 회개하지 않는 자들을 향해 요나보다 더 큰 자가 바로 자신임을 역설하고 계십니다.
앞으로 계속해서 구약에 계시된 예수님에 대하여 주제별로 다룰 때 영적인 눈과 귀가 더욱 활짝 열려 우리 영혼의 구세주이신 예수님에 대한 이해가 더 깊고 넓어지기를 기대하며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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